평범한 삶 속 비범함, “우리 어머니를 소개합니다”
[아시아엔=이남경 인턴기자] 비석 하나로 한 인간의 삶이 모두 설명될 수 있을까. 고된 인생사를 감추듯 간단하게 생략된 비문은 단 몇 줄로 고인을 정리해 버린다. 허무하게 사라져가는 고인에 대한 기억은 비석만큼이나 무거운 슬픔이 된다. 고인에 대한 기억을 빨리 떨쳐버려야 할 대상이 아닌,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이 된다면 영원한 작별에 심심한 위로가 될 것이다.
영화 <어바웃 타임> 속 주인공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는 이 능력으로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긴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와 자신의 행복했던 과거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주인공과 젊은 모습의 아버지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 비로소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고인을 떠나보내며 누구나 <어바웃 타임> 속 주인공처럼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도 고인을 다시 만날 수도 없다. 영화와 현실은 다른 것일까. 그러나 고인은 또 한 번의 만남을 갈망하는 우리를 위로하듯 당신들의 흔적을 남겨놓고 갔다. 마지막 선물인 샘이다. 주인을 잃은 채 장롱 깊숙이에 박혀있는 빛바랜 사진들과 일기장. 고인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은 고인의 지난 삶을 맞추어 나가는 퍼즐조각이 된다.
여기 그 퍼즐조각으로 완성된 책 한권이 있다. 유명한 작가의 책도, 베스트셀러도 아니지만어느 서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시는 출판되지 않는 책이다. 소박하게 편집된 한 권의 책은 한 여인의 한평생을 즐겁게 풀어나간다. “해방되기 전해 겨울 어느 날 경기도 개풍군 풍덕면 우리 마을의 옆인 흥교면 죽동에 경주 이씨 집안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고인의 일기에서 발췌한 글들은 그렇게 단 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바웃 타임> 속 판타지는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이 책 안에서 그리운 엄마와 딸, 할머니와 손녀, 손자가 만난다. 구어체로 진술되는 이야기들은 마치 고인의 목소리처럼 생생하게 일련의 사건들을 말해준다. 개풍군 이장 댁 맏딸로 ‘가진이’란 아명으로 불리던 어머니, 전쟁과 분단으로 친정 식구들과 생이별한 어머니, 병약한 시어머니와 시동생들을 억척스럽게 먹이며 살아낸 어머니. 칠십 여년 남몰래 숨기고 살아온 고된 세월들이 남겨진 가족들에 의해 재구성된다. 미처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의 조각들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어머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막내딸의 마지막 인사는 비로소 아름다운 이별에 마침표를 찍는다.
한권의 책을 내기까지 수십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일기를 읽고 글을 고쳤을 가족들의 노고가 짐작된다. “할머니가 우리의 할머니여서 정말 감사했고 행복했습니다.” 손주들이 할머니에게 전하는 말들은 고인이 얼마나 따뜻한 할머니였으며 어머니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족들은 지치고 힘든 삶 속에서 때때로 이 책을 들여다보며 힘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위대한 유산이 또 있을까.
과거 자식은 부모가 돌아가신 뒤 삼년상을 지냈다. 외출 때에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하여 방갓을 쓰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 변화에 따라 고인을 기리는 의식도 과거와 달라졌다. 단순한 축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한다. 사진작가 안드레아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할아버지의 물건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을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 것이다.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자인 최지월씨 또한 소설 <상실의 시간들>(한겨레출판)을 펴내며 어머니와의 시간들을 정리했다. 작가는 2년 전 어머니 죽음을 겪은 뒤 애도의 과정을 스스로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소설은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례식 풍경과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던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새로운 애도의 방식들은 ‘죽음’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빨리 떨쳐버려야 할 것, 혼자 견뎌야하는 것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슬픔은 즐거운 추억으로 돌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진심을 담은 책 한권. 고인과의 마지막 소통은 그 지혜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