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시와 음악] ‘가을의 속도’ 최하림

    줄달음쳐 오는 가을의 속도에 맞추어 나는 조금 더 엑셀러레이터를 밟습니다 차가 빠르게 머리를 들고 나아갑니다 산굽이를 돌고 완만하게 경사진 들을 지나자 옛날 지명 같은 부추 마을이 나오고 허리 굽은 노인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는 모습이 보이고 가랑잎도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내립니다 물이고 가랑잎이고 가을에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산 속의 짐승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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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가을 편지’ 이흔복

    고죽을 향한 홍랑의 일편심 사랑이 붉어서 가을은 달빛도 한층 높아만 갑니다. 당신은 물로 만든 몸 당신은 벌써 오랫동안 진리보다는 애정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발 헛디딘 나 사랑에 아팠습니다. 사랑을 사랑했던 자신에게만 들키고 싶은 낯선 시간 저 아래 저 아래로 흘러흘러 나 스스로 어디에서 몽리청춘夢裏靑春을 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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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거미’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 金洙暎(1921~1968) 詩選集, ‘사랑의 변주곡’, 창비,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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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늦가을 감나무’ 함민복

    저거 좀 봐 밝은 열매들이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나무를 들고 있는 것 같네 사뿐, 들고 있는 것 같어 대롱대롱 들고 있는 것 같지 그러라고 잎도 졌나봐 어! 구불구불한 가지들이 슬금슬금 펴지네 -함민복(1962~)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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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마른 국화 몇 잎’ 황동규

    다 가버리고, 남았구나 손바닥에 오른 마른 국화 몇 잎. 짧은 가을이 갔다. 떨어진 나뭇잎들 땅에 몸 문지르다 가고 흰머리 날리며 언덕까지 따라오던 억새들도 갔다. 그대도 가고 그대 있던 자리에 곧 지워질 가벼운 나비 날갯짓처럼 마른 국화꽃 내음이 남았다. 우리 체온이 어디론가 가지 못하고 끝물 안개처럼 떠도는 골목길에 또 잘못 들어섰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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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늦가을 문답’ 임영조

    그 동안 참 열심히들 살았다 나무들은 마지막 패를 던지듯 벌겋게 상기된 이파리를 떨군다 한평생 머리채를 휘둘리던 풀잎도 가을볕에 색 바랜 몸을 뉘고 편하다 억척스레 살아온 저마다의 무게를 땅 위에 반납하는 가벼움이다 가벼워진 자만이 업을 완성하리라 허나, 깨끗하게 늙기가 말처럼 쉬운가 아하! 무릎 칠 때는 이미 늦가을 억새꽃이 절레절레 제 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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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조금은 아픈’ ? 김용택

    가을은 부산하다. 모든 것이 바스락거린다. 소식이 뜸할지 모른다. 내가 보고 싶고 궁금하거든 바람이 이는 풀잎을 보라. 노을 붉은 서쪽으로 날아가는 새떼들 중에서 제일 끝에 나는 새가 나다. 소식은 그렇게 살아 있는 문자로 전한다. 새들이 물가에 내려 서성이다가 날아올라 네 눈썹 끝으로 걸어가며 울 것이다. ? 애타는 것들은 그렇게 가을 이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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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텅빈 우정’ 심보선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손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손이 무한정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우연에 대하여 먼 훗날 더 먼 훗날을 문득 떠올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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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 그대 살 속의 오래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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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갈꽃’ 김지하

    싸늘한 듯 살가운 가을풀 냄새 이리 돌아오는 옛 마을 코끝에 또 가슴속에 갈꽃 하나 흔들려 나 지금 거리에서 버티고 모멸에도 미소짓고 술 취한 밤 파김치 발길이 집 찾아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은  갈꽃 하나 내 아내 마음의 틈 이 가을 숨쉬는 일 모두 다 아아 귀향! – 김지하(1941~2022) 시집, ‘花開’,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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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벼’ 이성부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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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책] 나는 왜 ‘대통령의 안보리더십’을 썼는가?···저자 김충남 “6.25 이래 최악의 안보위기”

      6.25 이래 최악의 안보위기다. 그런데 우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처럼 집안싸움에 여념이 없다. 김정은이 설마 동족을 향해 핵을 쏘겠는가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북한은 여러번 우리 뒷통수를 쳤다. 단기적 접근으로는 안보를 그르칠 수 있다. 단기적으로 합리적이었던 것이 장기적으로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책은 1948년부터 현재까지 역대 대통령의 안보리더십을 평가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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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명숙의 시와 음악] 아버지와 어머니

    작은 가방을 들고 자하철 계단을 올라가는 노신사를 보며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막내가 첫 월급을 타서 사드린 가방에 문고판 책 한 권과 디카를 넣고 다니는 아버지는 당신의 세상을 찍어 저장했다 인터넷 속 위성지도로 태어난 고향집 근처를 찾아 어릴적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날마다 아버지의 새로운 세상처럼 말씀하셨다 친구 문병 갔던 병원의 암병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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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황숙黃熟’ 홍사성

    가을이 물든 들판에 나갔더니 누렇게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뻣뻣한 것들도 더러 보였는데 거의가 쭉정이거나 덜 익은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어떤지 잠시 돌아봤더니 아직은 좀더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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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 음악] ‘어떻게 피면 들국처럼 고요할 수 있을까’ 이기철

    혼자 있는 날은 적막의 페이지를 센다 페이지마다 햇볕에 말린 참깨 알 소리가 난다 여기 수천 번 다녀간 가을이 갈대 화환을 들고 또 고요의 가슴을 딛고 와 커튼을 젖힐 때 새 떼는 우짖고 들국은 까닭 모르고 희어진다 심근경색인 바람이 혼자 불고 냇물은 살을 여미며 흘러간다 조금쯤은 괴로울 줄도 알아야 살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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