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람세계칼럼

한국전 참전 ‘찰리’를 기다리는 아내의 바느질-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며칠 전 해운대에서 열리는 학회에 가는 길에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찾았다. 의예과 학생이던 1977년에 한 번 와본 뒤 처음이었다. 세월만큼이나 공원의 모습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협소한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없어 멀리 세우고 걸어가야 했다. 터널을 지나 입구에 이르니, 베레모와 선글라스를 쓴 잘생긴 의장병이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젊은 병사의 단정한 자세는, 이곳이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아직도 누군가를 지키는 장소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사무실에서 네덜란드군 덴 오우덴 중령의 묘역 위치를 묻자, 칠순쯤 되어 보이는 도슨트가 직접 그곳까지 안내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나를 제2전시관으로 이끌었다.

작은 유리 진열장 안에는 『The Name’s Still Charlie』(1993)라는 빛바랜 책이 펼쳐져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부상한 뒤 세상을 떠난 호주군 찰스 허큘리스 그린(Charles Hercules Green, DSO) 중령의 부인 올윈 그린(Olwyn Green)이 남편을 기리며 쓴 책이었다.

벽 한쪽에는 잿빛 누비이불처럼 보이는 커다란 퀼트가 걸려 있었다. 윗부분에는 오선지와 음표가 수놓아져 있었고, 아래에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호주군 34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호주 섬유예술가 메러디스 로우가 한국 불교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고, 호주 빅토리아주 콜러레인 지역의 바느질 모임 ‘싯 앤 소우’ 여성들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완성했다고 한다. 2016년 제막되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천 위에 수놓인 340개의 이름을 바라보다가 문득 만해 한용운의 ‘수의 비밀’이 떠올랐다.

나는 마음이 아프고 쓰린 때에
주머니에 수를 놓으려면
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돌아오지 못한 ‘찰리’를 기다리던 올윈은 주머니에 수를 놓듯 한 줄 한 줄 남편의 이름을 글로 꿰매었을 것이다. 바느질 모임의 여성들 가운데는 그 340명의 아내와 딸의 마음을 대신한 이들도 있었으리라. 디자이너가 한국 불교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말은,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 얽혀 있다는 연기의 뜻을 어렴풋이 헤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시관을 나서니 유난히 붉은 겹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초록빛 물이 막 오르는 두 줄의 메타세쿼이아 사이를 걸어 나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살아 있는 자는 떠나고, 이름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마치 영계를 바라보듯.

2010년 6월 한국전 60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6·25 참전 노병이 부산 유엔기념공원 전우 묘 앞에 헌화하고 있다.
▼ 아시아엔 후원계좌 ▼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은 아시아엔과 아시아 저널리즘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은행 1005-601-878699 (주식회사 아자미디어앤컬처)

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본 광고는 Google 애드센스 자동 게재 광고이며, 본 사이트와는 무관합니다.
Back to top but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