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부음을 접하고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도의 말을 잇지 못해서라기보다, 그와 관련된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자와 정치인이라는 관계로는 다 담기지 않고, 개인적 인연이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그는 늘 논쟁의 중심에 있었고, 나와는 접점과 어긋남이 교차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해찬’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정치 현장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였다. 1970년대 후반 대학 시절, 미국 사회학자 C. W.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 한국어판에서였다. 그는 이 책의 번역자였다. 개인의 문제가 사회 구조의 문제로 전환되는 지점, 사적 고통이 공적 언어를 획득하는 순간에 대한 통찰은 이후 기자 생활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1998년 7월, 김대중 정부 첫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한겨레신문 교육부 출입기자로 만나 이 책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장관님, 그 책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웃으며 “수배 중일 때였어요”라고 답했다. 시대가 만들어낸 묘한 장면이었다.
1998년 2월 말, 김대중 정부 첫 내각 발표 장면 역시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TV 화면에 ‘교육부 장관 이해찬’이라는 자막이 뜨는 순간,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기자로서의 판단과 함께, 교육개혁을 기대하던 시민의 감정이 겹친 순간이었다.
이해찬은 1998년 3월부터 1999년 5월까지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김대중 정부 초기 교육개혁을 이끌었다. 당시 출입기자들이 지켜본 그의 회의 방식은 파격적이었다.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요구했으며, 결정을 미루지 않았다. 교사 정년 단축 추진, 대학 정원 조정과 구조 개편 논의, 국립대 운영 방식 개선, 교육 행정의 효율화 등은 사회적 논쟁을 불러왔지만, 적어도 ‘결정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는 권력’과는 분명히 달랐다.
1998년 7월, <월간중앙> 청탁 원고를 위해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개인적 꿈을 묻는 질문에 “국회의장”이라고 답했다. “조정하고 결론을 내리는 일이 좋다”고 했다. 이후 그는 7선 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대표,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이 오래된 바람은 끝내 현실이 되지 못했다. 언론은 그에게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이재명 등 여러 대통령과 함께한 ‘킹메이커’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국회의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면 다른 평가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얼마 뒤인 8월 말, 그의 딸과 관련된 불법 과외 의혹을 취재해 기사로 작성했으나 지면에는 실리지 않은 일도 있었다. 이후 그는 한동안 기자실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치러진 대학수학능력시험 당일, 오랜만에 기자실을 찾았고 짧은 인사를 나눴다. 그해 연말 송년회 자리에서야 묵은 감정이 정리됐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갈등을 오래 끌지 않는 성정이었다.
1999년 5월 개각으로 장관직을 떠났을 때, “개혁을 시작한 사람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취지의 비판적 칼럼을 썼다. 칭찬과 비판이 뒤섞인 글이었지만, 그것이 그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이었다.

2005년 2월부터 2006년 3월까지 그가 국무총리로 재직하던 시절, 한국기자협회장으로 재외동포 기자 행사를 주관하며 총리공관 초청을 요청했고 그는 이를 수용했다. 이후 총리공관 오찬은 관례로 이어졌다.
2016년 4월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세종시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했을 때에는 이기우 전 교육부 차관, 김경회 전 교육부 공보관, 중앙일보 오대영 기자와 함께 선거사무실을 찾았다. 의외의 방문에 그는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1998년 이후 남아 있던 묵은 감정은 그 자리에서 모두 정리됐음을 확인했다.

이해찬은 분명 논쟁적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한국 정치에서 피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의 개혁 의지와 실행력만큼은 분명했다. 그가 더 이상 이 시대에 없다는 사실이 아쉬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의 기자 시절 한복판에, 이해찬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서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