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외 전적지를 답사하는 전사학 전공 지인이 며칠 전 에티오피아에서 소식을 전해왔다. 아디스아바바에 위치한 지하 1층~지상 1층 규모의 전승기념관은 전시 유물이 많지 않지만, 마지막 전시실 한켠에 ‘6·25전쟁 참전용사’로 소개된 전설적인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Abebe Bikila)의 사진이 걸려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가 달리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66년, 우리는 상도동에 살고 있었다. 어느 가을날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노량진으로 나갔다. 그날 그곳에서는 마라톤대회가 열리고 있었고, 도로 양옆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한 무리의 선수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저기 저 검은 사람이 온다”고 말하며 시선을 모았다. 서울대 문리대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해 월계관을 썼던 적이 있는 아버지는, 선수들이 지나갈 때 포스터에서 보았던 이름-‘아베베 비킬라’, ‘키미하라’, ‘와테라사’-를 크게 불러 응원하고, 뒤따르는 한국 선수들에게도 “힘내라”고 외치라고 내게 일러주었다.
그가 선두로 달려왔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수의 이름을 외친다는 것이 부끄러워 입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는 영어로 “아베베!”를 외치며 응원했다. 그때 달리던 그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왜 저 사람은 뒤를 보면서 뛰어?”
아베베 비킬라는 6·25전쟁 참전용사였다. 그는 1951년, 열아홉의 나이에 에티오피아군 2진으로 한국에 파병되어 1년간 부대장 호위병으로 근무했다. 그는 자신의 한국전 참전을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다. 1960년 9월, 로마올림픽 마라톤에서 그는 2시간 15분 16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통과했다. 맨발로 달려, 자신의 조국을 침공했던 적국의 수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는 다시 2시간 12분 11초의 세계 최고기록으로 우승하며, 올림픽 마라톤 사상 최초의 2연패를 달성했다.
1959년 9월 28일 열린 ‘9·28 수복기념 국제마라톤대회’는 한국 최초의 국제 마라톤대회였다. 인천 중구 해안동 로터리에서 출발해 서울 중앙청 앞까지 이어지는 42.195km의 국제 규격 코스로,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는 국제 행사였다. 1966년 10월 30일, 국제 스포츠계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던 한국에서 ‘9·28 서울수복 기념 제3회 국제마라톤대회’가 열렸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여러 나라에 초청장을 보냈지만 반응은 미미했고, 참가 선수도 많지 않았다. 여기에 아베베 비킬라가 참가해 2시간 17분 4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그는 이 대회에 참가한 이유에 대해 “6·25전쟁 참전 당시 대한민국 국민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대회는 그가 42.195km를 완주한 마지막 공식 마라톤이었다.
1969년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이후 장애인 양궁 선수로 활동하며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모습을 당시 TV 뉴스로 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뇌출혈로 1973년, 마흔한 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여러 해 전, 춘천 공지천에 있는 에티오피아 참전기념비를 찾은 적이 있다. 그곳에는 한국전쟁 당시 에티오피아 근위대 1개 대대가 파견되어 강원도 화천, 산양, 문릉, 금화 등지에서 공산군과 싸웠고,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었다.

기념탑 꼭대기에 서 있는 청동 사자상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온 힘을 다해 잡은 참치를 상어 떼에게 모두 빼앗기고 뼈만 남은 채 돌아온 노인은 “내일 다시 바다로 나가야지”라고 중얼거리며 잠이 든다. 그리고 그는 젊은 시절 아프리카 해안에서 보았던 사자의 꿈을 꾼다.
올림픽 마라톤 2연패 이후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었지만, 장애인 양궁 선수로 끝까지 투혼을 발휘했던 참전용사-아베베 비킬라. 나는 그를 그렇게 기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