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29일 오후 익산에서 남곡선생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익산희망연대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이 자리에는 주관 단체 회원들과 지리산 연찬 식구들이 많이 참여했다. 멀리서도 나와 오랜 인연이 있는 선생의 후배 몇 분이 참석해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올해 창립 22돌을 맞은 익산희망연대는 출범 초기부터 지금까지 남곡선생이 이 단체의 멘토 역할을 해오셨기에 이번 행사를 준비한 듯했다.
희망연대에서 이번 기념회 축사를 도법스님과 나에게 부탁했는데, 마침 도법스님 문중에 상(喪)이 생기는 바람에 스님께서 자신의 축사까지 함께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래서 졸지에 두 사람 몫의 축사를 하게 되었다. 주최 측이 도법스님과 나에게 축사를 부탁한 것은, 남곡선생과 도법스님, 그리고 나, 우리 세 사람의 이름으로 지리산 연찬을 함께 해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달 출간된 남곡선생의 책 <논어를 연찬하다>는 900쪽을 훌쩍 넘는 방대한 저술이다. 원래 <논어>는 원문만 보면 1백쪽 남짓의 얇은 책에 불과한데, 그 책을 풀어 쓴 분량이 무려 원문의 아홉 배를 넘는 것이다. 그래서 축사 때 “양자물리학 공부로 딸 결혼 날짜도 잊는다는 이 시대에, 2500년이나 지난 공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구라를 치는 걸 보면 선생의 구라빨도 이 시대 누구 못지않다”고 조금 골려볼까 했다.

하지만 막상 앞에 나와서 기념회에 오신 분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갑자기 목이 매었다. 그래서 내 입에서는 ‘반갑다’, ‘고맙다’는 말이 먼저 터져 나왔다. 축하하러 오신 한 분 한 분이 그저 고맙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평소처럼, 선생을 형으로 모시는 후배로서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먼저 전했다.
이번 책의 부제가 ‘전환과 통합을 위한 지혜의 서(書)’이다. 부제에서 보이듯이, 팔순이 넘은 형이 아마도 마지막 작업이라 할 수 있을 이 책에 담은 뜻이 여기에 있다. 이 책은 공자의 말을 빌려 이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며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남곡형의 간곡한 당부의 기록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곡형과 나는 지난 십수 년간 ‘지리산 연찬’이라는 이름으로 만나며, 개인사에서부터 나라의 정치와 인류문명의 전환에 이르기까지 여러 생각을 나누고 고민을 함께 해왔다.
그 과정에서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다름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삶의 경험이 감성과 생각을 다르게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든 속마음을 터놓고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남곡형을 함께 사유를 나누는 벗을 넘어, 혈육의 친형제처럼 느끼곤 한다. 그래서 종종 농담처럼 형에게 이제 남은 일은 잘 죽는 일뿐이니, 때 되어 돌아가시면 호상은 내가 맡아 당신 죽음을 책임질 테니, 죽음 이후의 걱정은 놓고 남은 날 잘 즐기시라곤 한다. 기념회 뒤 우리 내외가 남곡형 댁에서 하루 묵어온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나, 민족상잔의 전쟁과 군부독재, 산업화 시대를 지나 민주화까지 이어지는 이 근현대사의 격동을 비껴가지 않고 온몸으로 겪어낸 한 존재의 삶과 생각은 곧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역사이며 시대의 증언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책 <논어를 연찬하다>는 그 체험을 ‘연찬’이라는 방식을 통해 오늘의 갈등과 대립의 시대를 넘어설 사유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반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논어를 풀이한 책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깊이를 지닌 책이라 생각한다.
남곡형과 나는 바둑의 호적수이기도 해서,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에도 두어 판 수담을 나눴다. 형은 이번 출판기념회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행사 가운데 하나였다며 여러 번 감사의 말을 되풀이하셨다. 생의 마지막 숙제를 마친 듯한 느낌이라고 한다. 나 또한 아우로서, 이번 행사를 기획해준 익산참여연대 식구들과 흔쾌히 책을 펴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박길수 대표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돌아오는 길, 모처럼 익산까지 온 김에 미륵사지를 한 바퀴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이면 12월 초하루, 올해 마지막 달의 그 첫날이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