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를 집에 모셔 왔습니다. ‘백난어멍’입니다. 다음 달에는 만 백 살입니다. 지난 10년간 병원과 요양원을 오가던 시간이 쏜살같습니다. 어머니와 한 지붕 아래 산 것도 벌써 반백 년이 지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취로, 하숙으로, 결혼 생활로 어머니와 떨어져 산 지 50년입니다.
사실 어머니는 저를 키워주신 분입니다. 제 생모는 저를 낳고 5개월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살려달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이분이 제 어머니가 된 겁니다. 핏덩이 같은 저를 안고 이웃 산모를 찾아다니며 젖동냥으로 저를 살려냈습니다. 그때는 분유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오랜 병치레를 하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졸지에 땅 한 마지기도 없고 빚만 치렁치렁 집안의 청상과부가 된 것입니다. 평생 일만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했지만 세상 최고의 정성으로 저를 키워 주셨습니다.
그때를 기억합니다. ‘저렇게 키워봤자 아이가 크면 쳐다보지도 않을 건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수군거림은 걱정이기도 했지만 비아냥대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 해야지’,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결심이 쉽지 않다는 걸 지금에야 깨닫습니다. 방송기자 생활은 바빴습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기도 어려웠습니다. 핑계였습니다. 고작 일 주일에 한번 어머님을 찾아 문안드리는 걸로 얼버무렸습니다. 막심한 불효였습니다.
10년 전에 저는 지역의 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어머니를 찾아 제가 사장됐다고 자랑했습니다. 어머니 덕분이라며 으스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심드렁했습니다. 기뻐서 울음이라도 터트릴 텐데 표정이 없었습니다. 설마, 치매였습니다. 그때 어머니 나이 90세였습니다. 그동안 나의 일에만 바빴을 뿐, 어머니의 건강을 챙겨드리지 못했던 겁니다. 불효입니다. 이런 불효도 없을 겁니다. 그때 서야 주섬주섬 제주는 물론 서울의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허사였습니다.
병원이나 요양원에 있을 때 어머니는 늘 집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제 가슴에 박혔습니다. 어머니가 가고 싶은 집은 자신이 태어났던 하원의 집이고, 저와 살았던 강정의 집입니다.
제 아내와 형님과 의논한 끝에 제 집으로 모셨습니다.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가끔 빙그레 웃기도 합니다. 아내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받았습니다. 가장 어려운 일이 기저귀를 가는 겁니다. 밥과 약을 먹이는 일입니다. 다시 핏덩이였던 저를 떠 올립니다. 기저귀를 갈 때 싫다고 앙탈을 부렸을 겁니다. 먹기 싫다고 숟가락을 내동댕이쳤을 겁니다. 앙탈이라도 좋고 내동댕이쳐도 좋습니다. 어머니도 저를 키우며 그랬을 겁니다. 어머니는 저를 알아보지 못해도 좋습니다. 저도 아기 때 어머니를 몰랐으니까요.
이제 어머니는 핏덩이인 제가 되고, 저는 서른두살 푸르디 푸른 나이의 어머니가 된 겁니다. 세상 살다보면 이렇게 서로 입장이 바뀌기도 하는 거군요. 이제 저를 키웠던 어머니의 심정으로 어머니를 잘 모실 겁니다. 이제 불효의 일기를 시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