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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거린사슴전망대에서 만난 남극노인성

“남극노인성, 또는 수성(壽星)이라 불리는 이 별은 무병장수를 상징합니다. 이 별이 밝게 보이면 나라가 융성하고, 이를 본 사람은 오래 산다고 여겼지요. 토정 이지함은 이 별을 보기 위해 한라산에 여러 차례 올랐고, 대정에 유배됐던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거처를 ‘수성초당(壽星草堂)’이라 부르며 노인성을 노래한 시를 남겼습니다. 남극노인성은 건강과 치유, 회복을 상징하는 제주의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본문에서 <사진 김건일>

거린사슴전망대에서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제주를 누구보다 잘 안다는 자부심도, 내 삶의 방향이 올곧다는 믿음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어느 가수의 노랫말이 깊은 밤 한라산 자락을 적시는 바람을 타고 내 마음에 닿았다.

남극노인성 때문이다. 남들이 퇴근할 무렵 창문을 닫으려다, 쨍하고 깨질 듯한 겨울 하늘과 눈이 마주쳤다. 한겨울에 저런 하늘이 있다니. 잠시 손을 멈춘 순간, 남극노인성이 떠올랐다. 오늘이다 싶었다. 곧바로 윤봉택 회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요즘도 남극노인성을 볼 수 있을까요?”

무병장수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 추사 김정희, 청음 김상헌, 운양 김윤식 등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동짓날 무렵 한양을 출발해 서귀포로 내려와 남극노인성을 보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평생 제주에서 살았다는 내가, 그들이 보았다는 별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을 외면하고 싶었다. 곧 답장이 왔다.

“밤 11시에서 새벽 2시 사이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을 정하면 거린사슴전망대에 가 있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함께 갈 사람은 아내와 아들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인터넷을 뒤지며 남극노인성에 대한 해설과 기사들을 훑어 읽었다.

남극노인성은 카노푸스(Canopus)라는 이름의 별로, 지구에서 약 310광년 떨어져 있다. 거리로는 8.6광년 떨어진 시리우스보다 훨씬 멀지만, 겉보기 밝기로는 밤하늘에서 두 번째로 밝다. 절대밝기로는 태양보다 수천 배 이상 밝은 거성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별 중의 별’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의례서인 <국조오례의>에 따라 이 별에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영주십이경 가운데 하나인 ‘서진노성(西鎭老星)’은 서귀진에서 새벽에 일어나 노인성을 바라보는 풍경을 최고의 경승으로 꼽았다.

밤 11시 30분, 거린사슴전망대에 도착했다. 제주시 쪽 하늘은 은하수가 너울대는 모습이 보일 만큼 맑았지만, 한라산 남쪽 하늘에는 간간이 구름이 걸려 있었다. 탐라문화유산보존회 윤봉택 회장이 먼저 와 있었다. 그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다. 시인이자 승려이고,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탐라문화, 특히 제주 불교 문화에 대한 조예가 깊다.

그가 가리킨 남쪽 하늘에 신호등처럼 반짝이는 별 하나가 또렷이 박혀 있었다. 수많은 별빛 속에서도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카노푸스였다.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사람을 만난 듯, 그동안 마음속에 쌓여 있던 부끄러움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윤 회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천문학자 못지않았다. 우주에 흩뿌려진 별무리들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유지되는 질서, 그 질서에 대한 설명이 별빛과 함께 빛났다.

“남극노인성, 또는 수성(壽星)이라 불리는 이 별은 무병장수를 상징합니다. 이 별이 밝게 보이면 나라가 융성하고, 이를 본 사람은 오래 산다고 여겼지요. 토정 이지함은 이 별을 보기 위해 한라산에 여러 차례 올랐고, 대정에 유배됐던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거처를 ‘수성초당(壽星草堂)’이라 부르며 노인성을 노래한 시를 남겼습니다. 남극노인성은 건강과 치유, 회복을 상징하는 제주의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겨울에 보는 북극성이어서 그랬을까. 북극성 또한 남극노인성처럼 신호등을 닮아 보였다. 문득 내 삶이 별빛과 겹쳐졌다. 내 인생의 항로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혹시 표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어도를 노래하며 고기잡이를 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고, 치매로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간 고모님의 행방도 문득 궁금해졌다.

우주를 관장하는 어떤 섭리가 한꺼번에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거린사슴전망대에서 만난 남극노인성 때문이었다.

김건일

아시아기자협회 이사, 한라일보 전 사장, 제주mbc 전 보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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