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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식 칼럼] 역사가 오늘의 한국사회에 던지는 경고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한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

권력의 자기기만과 민주주의의 피로

버질은 “역사는 인간의 발걸음과 실수의 기록”이라 했다. 리델 하트는 이 말을 더 날카롭게 밀어붙였다. 그는 전쟁사와 정치사를 평생 탐구하며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주진 않지만, 무엇을 피해 가야 하는지는 분명히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특히 권력자와 조직은 이 경고를 쉽게 외면한다. 한국 사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위기-안보의 불확실성, 산업 경쟁력의 동요, 민주주의의 피로-는 모두 “역사적 교훈, 즉 공인이 공적 가치를 멸실하고 외면한 결과”라는 공통된 뿌리를 갖고 있다.

권위주의적 자만과 진실 은폐의 비용

리델 하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지휘부가 참담한 실패를 거듭한 핵심 이유를 “진실의 은폐”와 “권위의 무오류성”에서 찾았다. 많은 장군들이 불리한 정보를 숨기고, 자신이 옳다는 신념을 유지하기 위해 부하와 상관을 속였으며, 결국 수십만의 목숨이 파셴데일 전투의 진창에 파묻혔다. 그는 이를 “선의로 포장된 자기기만이 만들어내는 집단적 파국”이라 불렀다.

오늘의 한국 정치와 관료제 역시 이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위기는 늘 존재했지만, 불편한 데이터를 외면하거나 내부 비판을 억누르는 문화는 여전히 강하다. 인구 급감, 경제 구조의 경직성, 청년 세대의 불신과 분노 같은 치명적 문제는 오랫동안 뻔히 드러나 있었지만, 정권은 ‘당장의 지지율’을 위해 축소하거나 미뤘고 상대편 정당을 꺾기 위한 권력 다툼만 난무했다. 리델 하트가 경고했듯, 사실을 불편하다고 감추면 더 큰 재앙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왜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가?

군사력과 안보-‘신앙’만으로는 생존 불가

리델 하트는 군사 조직이 본질적으로 낙관주의와 충성심을 강요하기 때문에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군인은 자신의 공격 가능성을 의심하는 순간 전투 의지를 잃는다. 그래서 군대는 의심을 억압하는 구조를 갖는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맹신은 전략적 오판을 부른다. 1930년대 독일군의 히틀러 추종, 제1차 대전 영국군의 교리 경직성이 그 전형이다.

오늘의 한반도 안보 환경도 비슷하다. 북한은 핵을 고도화하며 실질적 2차 타격 능력을 확보하고 있고, 우리 군의 전투함과 외형상 동급 수준 이상의 함정을 과시하며, 중국과 러시아는 새로운 ‘회색지대 하이브리드 전쟁’을 전개한다. 미국조차 트럼프 이후 “동맹의 비용과 가치를 재평가”하며 이기적 현실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일각에는 여전히 “결국은 한미동맹이 지켜줄 것”이라는 막연한 신앙이나, 반대로 인구와 군의 규모가 급격히 줄어들고 부대가 해체되어도 “우리는 첨단무기와 AI만 있으면 된다”는 낙관론이 공존한다. 리델 하트는 이미 경고했다. “무기는 사기와 분리될 수 없지만, 사기만으로 전쟁을 이길 수는 없다.” 군사력은 냉정한 사실과 검증된 전략 위에 세워져야 한다.

민주주의의 취약함-느린 합의와 평범함의 승리

리델 하트는 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가장 느린 사고의 흐름에 맞춰가며 평범함이 승리케 하는 체제”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동시에 “전제주의의 어리석음보다 민주주의의 평범함이 덜 위험하다”고 평가했다. 민주주의의 약점은 효율이 아니라 비판 정신의 소멸이다.

권력을 감시하고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언론이 권력과 야합하고 권력자를 칭송하며 경고가 줄어들면, 민주주의는 빈껍데기가 된다. 오늘 한국의 정치 문화는 이 경고를 무겁게 새겨야 한다. 정파적 증오와 감정적 진영 논리가 사실 검증을 대체하고, 언론은 ‘편 가르기’와 ‘클릭 장사’에 매몰되어 깊이 있는 비판을 포기했다.

국민은 경제가 어려워 가슴을 졸이고 국제정세 변화와 중국의 간접 침략인 초한전이 횡행하는데도, 통수권자는 전방을 돌아보며 장병을 격려·점검하기보다 먹방 촬영을 하여 시비가 붙고, 여야 모두 단기적 지지층 결집을 위해 불편한 정책적 진실-고령화, 재정부담, 안보 비용-을 외면한다. 리델 하트는 “사실을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진보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민주주의가 바로 이 질문 능력을 잃고 있다.

산업·국가 전략-과거의 실패 재발 방지

리델 하트는 전쟁뿐 아니라 국가 경영에도 ‘넓은 간접 경험’을 흡수하는 능력을 강조했다. 그는 “직접 경험은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다. 역사는 보편적 경험의 집합이며, 타인의 실패를 통해 더 안전한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의 산업정책은 종종 과거의 집단적 성공 신화를 신앙처럼 붙든다. 조선·자동차·반도체의 성공 방정식을 미래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착각은 위험하다. 세계는 공급망 재편, 기술 패권 경쟁, AI 혁신으로 격렬히 재편되고 있다. 일본·미국·중국 모두 자국 산업 기반을 총동원해 새 판을 짜는 가운데, 여전히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다시 국제통화기금 체제의 구제를 노리고 이면계약을 했다”는 말이 들리고, “수출 드라이브와 대기업 중심”의 20세기식 성장 모델에 갇혀 있다. 국민은 죽을 맛인데 국회의원들은 몇 백만 원의 떡값을 자급받고 있다.

리델 하트가 말한 “넓은 시야와 냉정한 자기비판 및 반성”이 절실하다. 실패를 솔직히 드러내고, 불편한 데이터와 현실을 기반으로 전략을 조정하는 용기-그것이 국가 생존의 첫걸음이다. 금방 드러날 통계 조작으로 여론을 호도해서도 안 된다.

오늘의 한국이 새겨야 할 교훈

리델 하트의 사상에서 오늘 한국이 얻어야 할 핵심 교훈은 세 가지다.
첫째, 진실을 감추지 말라. 불편한 정보와 내부 비판을 억누르는 조직은 반드시 치명적 실수를 반복한다.
둘째, 맹목적 충성과 단순 낙관을 경계하라. 군사·외교·산업 전략은 냉정한 사실과 역사적 경험 위에서만 유효하다.
셋째, 비판적 시민정신을 되살리는 데 언론이 앞장서라. 민주주의는 느릴 수 있지만, 질문을 잃는 순간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는 길로 간다.

오늘의 한국은 안보·경제·민주주의 모두에서 “편안한 신화”를 붙잡을 유혹에 빠져 있다. 동맹이 끝까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신앙, 과거의 산업 성장 방정식이 미래도 지켜줄 것이라는 자기 위안, 민주주의는 스스로 굴러간다는 환상은 모두 위험하다. 리델 하트의 말처럼 “우리는 다른 이의 불행에서 배우는 덜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는 다시 우리를 시험할 것이며, 그 시험의 대가는 훨씬 더 혹독할 것이다.

역사는 완벽한 길잡이는 아니지만, 반드시 피해야 할 낭떠러지를 알려주는 지도다. 지금 우리가 그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우리의 다음 위기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가 혼탁하게 된 근본 이유는 공직자가 공인의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자 경종이다.

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전 1기갑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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