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걸은 시스템공학자의 초상
로버트 프로스트가 쓴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노란 숲 속에서 두 갈래 길을 마주한 화자가 덜 붐빈 길을 선택한 후, 그 선택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회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선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단정하는 심리를 반영한 시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필자는 지만원 박사를 그의 <시스템이냐 신바람이냐>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 하나>를 통해 현상을 새롭게 진단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지 박사는 파월 용사이면서 참으로 역동적인 삶을 살아온 분이다. 그의 회고록을 단 이틀 만에 단숨에 읽었다.
사람의 인생은 길 위에 남은 수많은 선택의 흔적이다. 어떤 이는 많은 이들이 가는 넓은 길을 택하고, 어떤 이는 아무도 걷지 않은 가시밭길을 선택해 걸어간다. 지만원 박사의 회고록 <뚝섬 무지개>를 읽으며 느낀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길의 무게와 고독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시스템 전도사”이자 군사평론가, 때로는 사회적 논쟁 속에서 “극우 또라이”라는 낙인을 감수한 사람이라 정의한다. 그러나 그 길은 단순한 반골 정신이나 이념적 고집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절대적 신념과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향한 집요한 실천으로 채워져 있었다.
시스템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 공학자의 시선
지만원 박사의 인생 궤적은 공학자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는 “시스템이란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밖에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라 정의한다. 은행 객장의 혼잡을 순번표 시스템 하나로 질서 있게 만든 사례를 들며, 사회의 병리현상은 ‘의식’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이는 그가 평생 붙잡고 씨름한 화두였다.
1980년대 국방부에서 윤성민 장관과 함께 군수물자 관리체계를 개혁한 일은 그 실천의 대표적 사례다. 자유재로 취급되던 군수품을 회계적 책임 아래 두고, 자원관리 참모와 전산비용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군의 자원 운용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이 개혁은 지금도 국방 재정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성과로 남아 있다.
5·18 문제와 20년에 걸친 법정 투쟁
그러나 그의 삶을 관통한 가장 큰 싸움은 학문적 연구나 행정개혁을 넘어서는 영역이었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의 게릴라전”으로 규정하며 9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18년 동안 재판기록을 분석하는 데 몰입했고, 그 결과 수십 건의 소송과 형사재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이를 “문제를 푸는 과정처럼” 대했다. 판사들을 이념적 적으로 규정하기보다 “공정한 두뇌를 설득할 글을 쓴다”는 태도로 임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수백 번의 법정 출석과 사회적 비난, 가족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인생 후반을 통째로 던진 이 싸움은 그가 걸어온 길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결론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20년을 감옥과 법정을 오가며 싸워왔다는 사실은 가볍게 평가할 수 없다.
광주 재판 과정에서 지 박사에게 린치를 가하고 행패를 부린 장면을 보았다. 정치가 역사를 왜곡하고 판결을 뒤집는 현실, 공정하지 못한 재판,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노인을 수갑으로 결박해 8시간을 이동시키며 폭력을 행사한 현실은 충격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는 그의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사적인 삶과 인간적 면모
회고록은 투쟁과 고독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그는 강원도 횡성 산골에서 태어나 서울로 홀로 올라와 고학으로 공부한 가난한 청년이었다. 부모에 대한 원망 대신 감사와 사랑을 품었고, 가족과 아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무엇이 내게 이로우냐보다 무엇이 정의냐에 따라 몸을 던졌다”고 고백하는 대목은, 이념을 떠나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자극이 없으면 퇴화한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몰아붙였고, 시간을 쪼개어 사유하며 목표를 좇았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정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태도는 젊은 세대에게도 울림을 준다.
사유할 지점을 남긴 회고록
<뚝섬 무지개>는 한 인간이 자신을 정리하는 고백이다. 공학자로서 시스템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한 시도, 국방재정 개혁의 실적, 그리고 무엇보다 5·18 문제에 대한 도전은 논란을 넘어 치열한 삶의 흔적이다. 우리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동의 여부를 떠나 “불의를 파사현정하려는 집념”과 “목표를 향한 지독한 몰입”은 오늘의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위해 얼마나 싸우고 있는가? 편한 길을 버리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할 용기가 있는가?
논란 속에서도 가치 있는 기록
지만원 박사의 삶은 분열적이고 도발적일 수 있다. 그러나 회고록은 단순한 자기찬양이나 피해자의 푸념이 아니라, 한 시대를 관통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인간의 기록이다. 공학적 사고와 역사 해석, 그리고 개인적 투쟁이 교차하는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의 갈등과 모순을 비추는 한 거울처럼 느껴진다.
진실을 둘러싼 해석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끝내 걸어간 한 인간의 뚝심과 고독, 그리고 그가 던지는 질문은 우리 모두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 책을 덮으며 남는 여운은 간단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정의를 위해 무엇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지만원 박사가 자신의 삶으로 던진 가장 큰 화두일 것이다.
월남전의 영웅 채명신 장군이 국립현충원 사병묘역에 묻히게 된 것도 지만원 박사의 주선 덕분임을 알았다. 그는 지도자가 머리가 나쁘면 좌익이 먼저 점령한다고 지적하며, 김영삼 이후 대한민국이 왜 좌경화되었는지를 분석한다. 또한 정인숙과의 인연, 공군 기종 선정 시 F-16으로 변경된 근거를 ‘대수보다 체공시간과 기종 수명 계산’으로 설명한 부분, 월남전 관측장교 시절 포병 운용을 통한 심리전 전략 등은 그가 단순한 논객이 아니라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음을 보여준다. 남북한 통일은 역설적으로 ‘영구 분단’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논란을 넘어 사유의 지평을 넓히며, 그 치열함은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