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정치사회

정동영의 기지와 YS의 결단, 안기부 엄익준의 차장 승진 ‘비화’

1996년 4월, 재경 전주고 동문회장에서. 오른쪽부터 정동영 새정치국민회의 의원, 엄익준 안기부 대북전략국장, 김기만 동아일보 기자

놀라운 기지로 고교 11년 선배를 안기부 차장으로 만든 정동영
딸 결혼식 대신 남북회담장…엄익준, 안기부 공채 출신 첫 차장에

1994년 7월 2일, 판문점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이 열렸다. 그 자리에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소속으로 국무총리 보좌관 직을 맡고 있던 엄익준(嚴翼駿, 전주고 37회, 당시 51세)도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장녀 혜선 씨의 결혼식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동료와 상사들은 “회담에 우선 참석하되 상황을 봐서 일찍 빠져 결혼식에 가는 것이 낫다”는 조언을 건넸다.

그런데 회담이 시작되기 전, 당시 문화방송 통일부 출입기자였던 정동영(현 통일부 장관)이 엄 보좌관을 불러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전언에 따르면 그는 고교 11년 후배에게 “오늘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옳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결국 엄익준은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다 다시 판문점으로 돌아왔다”는 식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전하지만, 이는 과장된 전언일 가능성이 크다.

그날 밤 MBC 뉴스데스크. 앵커는 전주고 동창이자 절친한 사이인 신경민 기자였다. 그는 판문점 회담 관련 보도를 마친 뒤 마지막 꼭지로 정동영 기자의 리포트를 연결했다. 정 기자는 “오늘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실무대표 접촉에 나온 우리 측 대표 엄익준 총리보좌관은 당초 딸 결혼식이 예정돼 있었지만, ‘아버지의 역할보다 공직의 사명이 더 중요하다’며 결혼식장을 뒤로하고 회담에 임했다”고 전하며, 그의 ‘선공사후(先公私後)’, ‘멸사봉공(滅私奉公)’ 자세를 강조했다.

마침 이 보도를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보고 있었다. 그는 비서를 불러 “저 사람, 내일 축의금 전해라. 300만 원”이라고 지시했다. 이는 당시 대통령이 내리는 축의금으로서는 최상한 액수였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이 보도는 즉흥적 깜짝쇼가 아니었다. 정동영과 신경민은 사전 교감을 하고 이런 보도를 준비했다. 영남 중심 인사가 주류였던 YS 정권에서 전북 출신 엄익준이 안기부 차장으로 승진할 가능성은 희박했기 때문에, 이른바 ‘한 건 만들어 보자’는 취지가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엄익준은 대북전략국장과 안기부장 특보 등 요직을 거쳤고, 1997년 마침내 차장 승진 기회를 맞이했다. 권영해 안기부장이 밀봉된 인사안을 들고 청와대에 보고하던 자리에서, 김 대통령의 눈길이 엄익준 이름에 머물렀다. “엄익준이? 그 사람, 딸 결혼식에 안 갔던 그 공직자 아니가?” 권영해가 답했다. “예, 맞습니다.” 그러자 YS는 짧게 말했다. “그 사람 시켜라. 그 정도 자세면 됐지.” 이로써 안기부 역사상 첫 공채 출신 차장이자, 전북 출신 차장이 탄생했다. 내부에서는 자체 승진을 통해 차장이 나온 첫 사례라며 크게 환호했다.

그러나 영광은 길지 않았다. 1997년 대선 정국에서 ‘북풍(北風)’ 사건이 불거지며 그는 관련 의혹에 휘말렸고, 1998년 3월 조직 개편 때 면직됐다. 하지만 대북 경험과 역량이 높이 평가돼 불과 석 달 뒤인 6월 다시 차장직에 복귀했다. 그는 이후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전력을 쏟았다. 그러나 2000년 초, 말기암 판정을 받는다. 그는 발병 사실을 아내와 보좌관 두 사람에게만 알리고 정상회담 준비에 매진했다. 6·15 정상회담이 확실히 예정된 것을 확인한 그는 그제야 주변을 정리하고, 회담을 한 달 남짓 앞둔 5월 3일 세상을 떠났다.

별세 전 달인 4월, 그는 이임사에서 세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국민 봉사. 둘째, 조직의 화합. 셋째, 끊임없는 자기계발. 그는 가족에게 남긴 유언에서 “조의금은 받지 말고 퇴직금은 장학기금으로 기부하라”고 했다. 장남 규용 씨는 훗날 “아버지는 무엇보다 명예와 정직함을 강조했다”고 회고했다.

엄익준의 별세 소식을 들은 김대중 대통령은 직접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그는 공직자의 사표였다”고 위로했다. 앞서 말기암 입원 보고를 받았을 때는 지갑을 꺼내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내주며 병원비에 보태도록 했다고 한다.

전주고 동문 사회에서는 엄익준을 ‘라매불(라면에 불사)’ 모임과 직접 관련 짓기는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그의 인생 행로는 ‘라매불 정신’을 구현한 삶이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공직자의 자세로 일관하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그는 그렇게 생을 마쳤다.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대표, 김대중정치학교 대외협력본부장,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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