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승헌 변호사(한변)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차렷 문화’에 갇혀 살아왔다”며 “그러다 보니 일상이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다”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이제 ‘열중 쉬어’와 ‘편히 쉬어’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쉬어’는 근심에서의 여백, 음악에서의 쉼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변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이장지도(弛長之道)를 인용한다. 활줄을 팽팽하게 맨 채로 활을 걸어놓으면 오히려 탄력이 떨어지고, 그렇다고 활을 느슨하게 두면 명중률이 낮아진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일정 시간은 팽팽히 조여주었다가 또 얼마 동안은 풀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긴장과 이완의 배합과 조화, 거기에 유머의 영토, 삶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외국에서는 대부분의 행사에서 연사가 말을 시작하고 나서 1~2분 안에 반드시 청중을 한 번 까무라치게 웃겨야 성공한 연설로 평가된다. 이를 쇄빙선(Ice Breaker)이라고 한다. 처음 시작할 때의 서먹하거나 밋밋한 분위기를 바꾸고 얼음을 깨며 앞으로 나아가는 쇄빙선의 역할은 전적으로 유머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유교문화가 오랫동안 지배했고, 이른바 양반문화나 점잖은 풍토가 우대받던 중에서도 광기(狂氣) 어린 법정과 철권 독재 군사 시절을 용기 있게 유머로 녹여내 온 한승헌 변호사께 경외(敬畏)의 감사 인사를 드린다.
국경을 오간 한변의 드라마 수작을 소개한다.
그가 2002년 무렵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을 맡았다.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전 국민적 모금 사업의 대표로 철저한 봉사직이다. 연말에 김대중 대통령(DJ) 부부를 모시고 30대 재벌 등 여러 관계자들이 초대받은 가운데 모금을 촉진하기 위한 식사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한 그의 인사말이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기부하다의 영어 단어는 도네이션(donation)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 단어의 어원, 뿌리를 찾아보니 우리말 ‘돈내이쇼’더이다. 심지어 ‘돈을 좀 더 내라’는 뜻의 ‘더내이쇼’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네이션’ 단어의 뿌리가 우리말이라는 것까지 안 이상, 올해에는 정말 모금 활동을 열심히 했으면 합니다.” 이런 말씀 때문이었는지 2002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모금액은 1,400여억 원으로 신기록을 달성했다.
최근 <한승헌 변호사의 삶. 균형과 품격>이라는 책을 쓴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승헌 변호사는 변호와 투쟁, 엄격과 유머, 세속과 탈속 등 열 가지에서 균형을 이룬 분”이라고 썼다. 흥미로운 분석이다. 어떻든 투쟁 일변도는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2022년의 고인 추모식 때 차남 규무 씨(62, 전 대학교수)는 설득력 있는 얘기를 전했다.
아버님(한승헌 변호사)은 1975년 구속·투옥되면서 무려 8년 5개월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셨다. 그런데 1983년 변호사 자격을 회복한 직후 시국 사건 변론 요청이 하나 들어왔다. 가족들은 솔직히 이번만은 하지 말기를 바랐고, 그런 의사도 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버님이 “내가 이걸 안 하면 사람이 아니지”라고 혼잣말하는 것을 들었다. 결국 변론을 했다. 규무 씨는 “아버님이 세상이 생각하듯 용기, 소신, 강단으로 뭉친 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다만 안타깝고 애틋한 사람을 어떻게 외면하느냐는 ‘차마’가 아버님의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은 “아버님이 주신 가훈(家訓)은 ‘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해도 부끄럽게는 살지 말자’였다고 했다.
유머는 결코 초인(超人)이 아닌 한 변호사가 권력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며, 권력의 오만을 녹이는 해학이자 에너지원이었다.
초대 대법원장 가인(嘉人) 김병로(金炳魯), ‘대쪽 검사’ 하강 최대교(崔大敎), ‘청빈 판사’ 바오로 김홍섭(金洪燮)은 우리나라 법조계를 대표하는 ‘법조 3성(聖)’으로 불린다. 개인적 의견이지만 여기에 한승헌 변호사를 추가해 ‘법조 4성’으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
[사진 설명]1. 어떤 이들은 고 한승헌 변호사를 ‘우리 시대의 이항복(李恒福)’이라고 불렀다.
2. 2022년 4월 25일 치러진 한 변호사 님 발인. 모교 전북대에서 노제를 지냈다.
3. 그의 책 47권 중 왼쪽 위가 1972년 38살에 쓴 <법과 인간의 항변>, 시계 방향으로 1994년에 간행한 <한 변호사의 초상>, 1997년에 나온 <불행한 조국의 임상노트>, 2012년에 발간된 <유머 수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