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문화칼럼

[이택순의 아무르 답사⑤] 두만강 건넌 선조들, 연해주에 뿌리내리다

우리는 빨치산 전투의 성지이자 발해의 옛 땅인 파르티잔스크와 신흥 항구도시 나홋카의 답사 일정을 2박 3일간 마친 뒤, 본격적인 연해주 답사에 들어섰다. 덜덜거리던 러시아 화물트럭 ‘라다’를 보다 안전한 산타페 차량으로 교체하고, 현지 운전 요원과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크라스키노 고려인 정착지

일정은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의 한인 독립운동지를 먼저 답사한 후, 두만강 국경 지역으로 떠나는 것이었으나, 편의상 방향을 바꾸어 두만강 국경 연해주 지역부터 기행해 보기로 했다. 이는 시대적 맥락에서 약간의 혼동을 줄 수는 있으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만강 국경 지역인 크라스키노(한자로 연추煙秋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이 지역 내 부락인 얀치헤(Янчихе)가 연추에 해당한다)까지는 약 250km, 왕복 500km의 여정이다. 도로 사정은 우리나라 국도 수준이지만, 곳곳이 파손되어 있어 시속 100km 이상은 위험하며 여유 있게 일정을 잡아야 한다. 이 머나먼 길을 일주일 넘게 걸어서 이동했던 고려인들과 독립지사들의 고초를 떠올리게 된다.

그들의 길은 정녕 고난의 길이자 개척자의 길이었다!

한국인이 연해주로 가는 길

한국인이 러시아 연해주에 입국하려면 어떤 경로를 택해야 할까?

이 문제는 1860년대 기아와 폭정을 피해 연해주로 탈출하던 조선인들에게는 생사의 문제였고, 2025년 한–러 관계가 악화되어 직항 항공편이 전면 중단된 현재 우리에게도 현실적인 문제였다.

크라스키노에서 본 두만강 하구지역

두만강 하류 지역은 한국·중국·러시아 3국 국경이 만나는 교차점으로 ‘삼합점’이라 불린다. 중국의 국경선은 두만강 하구에서 약 17km 상류에서 끝나며, 중국은 이곳에서 동해로 나가는 길을 상실했다.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제국주의 러시아에 연해주를 할양했던 결과였다. 청말의 국력 약화와 내부 혼란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두만강 하싼으로 향하는 러시아 철도

이로써 조선과 러시아는 두만강 하류를 경계로 직접 접경하게 되었다. 약 17km를 사이에 두고 연해주 하싼군 크라스키노 지역과 함경북도 경흥군(현 나선특별시)이 마주한다. 현재는 러시아 하싼역에서 북한 두만강역까지 철교로 연결되어 있으나, 조선 말기에는 저습지로 인해 연결 도로가 거의 없는 황무지였다.

조선 말기까지 두만강 하구–녹둔도(현 러시아령 크라스노예셀로)–하싼–크라스키노를 잇는 교역로가 있었다. 이 길을 통과한 공식 기록으로는 조선 중기 이순신 장군이 초급 군관 시절 녹둔도 초소에서 여진족과 벌였던 녹둔도 전투, 그리고 1908년 6월 안중근 부대의 국내 진공작전 기습 경로 외에는 드물다.

안중근의 연해주 입국 경로 <자료 안중근기념관>

주요 접근로: 남양–훈춘–크라스키노 루트

주 접근로는 경원군 남양–훈춘–크라스키노 루트였다. 경흥 인접지역인 경원군 남양면이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훈춘(琿春)과 마주하고 있다. 강폭이 좁은 이 지점을 건너 훈춘을 통과하면 연해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선 말기 연해주 이주민의 대부분이 이 경로를 이용했다.

또 다른 루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북간도 용정을 거쳐 훈춘을 지나 크라스키노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루트는 북간도 연길(옌지)에 이주한 조선인들과, 을사조약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이용했다.

간도 관리사 이범윤, 포수 출신의 항일 무장투사 홍범도,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 헤이그 특사 이준·이상설, 이동휘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며 이 길을 따라 러시아에 들어왔다. 현재도 연길 조선족 동포들과 일부 한국인 여행자들이 이 루트를 이용하고 있다.

19세기 말 함경도 해안의 어부와 어선

극히 일부지만, 바닷길을 이용해 청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밀항하는 해상 루트도 존재했다. 이는 매우 위험한 항로였다. 김경천 장군의 부인 유정화는 가족과 함께 이 해상 루트를 통해 이주하려 했으나, 경성에서 청진까지 온 뒤 위험을 감지하고 회령–용정–훈춘–크라스키노 육상 루트로 변경했다.

러일전쟁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청진–원산–부산을 잇는 항로가 개설되었고, 오늘날 동해–블라디보스토크 정기항로의 기원이 되었다.

연해주에 이주한 고려인 가족의 모습

1863년 여름, 함경북도 경원군 주민 양응범과 무산군 주민 최운범이 14가구, 약 60여 명을 이끌고 경원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이들은 훈춘을 거쳐 크라스키노를 지나 10여 km 동쪽의 지신허에 도착해 개간을 시작했다. 이는 러시아 측 문서에 기록된 최초의 연해주 한인 이주로, 국경초소장 레자노프 중위의 보고서에 등장한다.

아마도 양응범과 최운범은 이주 몇 해 전부터 여름철이면 전인미답의 크라스키노 일대로 들어와 농사와 수렵을 하며 지형과 기후에 익숙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중간의 부락이 연추(안치헤)마을, 뒤쪽 산악이 중러국경연추(얀치헤)

사진 속 중간에 보이는 마을이 연추(안치헤)이며, 뒤편의 산악지대는 중·러 국경이다. 당시 국경초소는 소수 병력이 지키는 군진지에 불과했기에 국경 대부분은 사실상 개방되어 있었다. 지형에 익숙한 그들은 초소를 피해 산악지대로 우회했다. 지신허 정착 중, 순찰 중이던 레자노프 중위에게 발견되었다.

이후 약 40년간, 주로 함경도 출신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이 루트를 따라 탈조선하였다. 1900년대 초 연해주 고려인 인구는 3만 명을 넘어섰다.

연해주, 조선인의 ‘신세계’였던 이유

1860년대 연해주는 조선인들에게 상상도 못 할 광활한 농토와 생존권,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신세계였다. 조선의 부패한 왕정 아래 기아와 폭정에 시달리며, 삶의 터전을 찾아 탈출한 것이다.

이는 강화도조약(1876년)보다 10년 앞선 개방이었으며, 하와이 이민(1904년)보다 40년 앞섰다. 일부 조선인들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넘어 자유의지로 개방과 개혁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크라스키노 전망대, 하싼의 영웅 동상

크라스키노 전망대에 서면 중국 훈춘에서 오는 도로와 두만강 하싼 쪽 도로가 갈라진다. 훈춘 방향 크라스키노 출입국관리소는 차량으로 붐비며, 트레일러·관광버스·승용차가 끊임없이 드나든다.

두만강 하구, 북한 하싼 철도역 방향을 배경으로 필자.

그러나 두만강 하싼 출입국사무소 방향(북한)은 도로와 철길 모두 정적만 흐른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국의 연해주 진출이 두드러지며, 북한 쪽은 더욱 고립되어 있다.

한인의 연해주 진출 150년이 지났지만, 이 지역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과 끌고 당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북한, 중국, 전쟁 중인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상황이 겹쳐지며, 우리는 크라스키노 전망대에서 선조들의 얼이 어린 두만강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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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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