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순의 아무르 답사기 30] 고려인의 꿈이 자란 땅, 추풍평원과 푸칠로프카

우수리스크에서 자동차로 약 20분 거리, 중국 국경으로 향하는 수이푼허 강변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진다. 1860년대부터 고려인들이 정착한 풍요로운 대지, 추풍(秋風·수이푼, 綏芬) 대평원이다. 이 평원에는 낯선 이름의 지명인 ‘푸칠로프카’ 마을이 이어진다.
러시아 지역 탐사 여행은 생소한 지명과의 싸움이다. 연해주와 아무르(흑룡강성)의 수많은 지역명이 러시아어, 중국어, 한국어, 한자, 여진·만주어 등으로 혼재해 표기되기 때문에 혼동이 다반사다. 중국과 러시아의 패권 경쟁 속에서 국경이 수시로 바뀌었고, 여기에 조선인 이민과 독립지사들의 진출이 더해지며 한국식 지명까지 붙었기 때문이다. 특히 추풍(수이푼) 지역의 지명 표기는 더욱 혼란스럽다.
복잡하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지명이 있다. 바로 ‘푸칠로프카’ 부락이다. 한국어로는 ‘육성촌(六姓村)’이라 불린 마을이다.
푸칠로프카 부락은 1860년대 후반 연해주 개척 초기 이 지역을 관리했던 러시아 육군 대위 ‘콘스탄틴 푸칠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푸칠로는 러시아 변방 지역의 행정관 역할을 맡고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고려인 출신 여섯 가구의 카레이츠(고려인·한인)는 그에게 난민 통제와 관리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푸칠로프 대위는 초췌하고 굶주린 이 고려인들에게서 성실함과 근면함, 그리고 억척같은 삶의 의지를 발견했다. 그는 낙후된 지역 개발을 위해서는 카레이츠와 같은 근면한 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상부에 보고해 이들의 초기 정착을 우호적으로 지원했고 귀화를 허락했으며 토지와 식량도 제공했다. 고려인들은 몇 해 지나지 않아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해냈다.
고려인들은 은인 푸칠로프 대위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 마을 이름을 ‘푸칠로프카’로 정했다. 이것이 연해주 정착사의 전형적인 과정이었다. 서로 다른 성씨를 가진 여섯 가구가 최초로 정착했기 때문에 고려인들끼리는 이 마을을 ‘육성촌’이라 불렀다.
주변 수이푼 강가에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고려인 모범 부락 네 곳이 존재했다. 이를 통칭해 ‘추풍4사(秋風四社)’라 불렀으며, 푸칠로프카·코르사코프카·크로우놉카·시넬리코보 지역이 여기에 속했다. 추풍 지역에는 19세기 말까지 약 3,800명의 고려인이 거주했다. 이들의 번영을 기반으로 조선의 망명객과 혁명지사들이 민족혁명의 둥지를 틀게 된다.
러시아로 이주한 카레이츠(고려인)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해 토지를 분배받은 사람’인 1부류 원호인(元戶人)과, 국적이 없어 토지를 배정받지 못한 2부류 여호인(餘戶人)으로 나뉘었다. 이 밖에 불법 입국자와 계절 노동자 등 제3부류 체류자들도 혼재해 있었다.

원호인은 법적 지위를 바탕으로 농업과 상업을 통해 재산을 축적했다. 그러나 여호인은 소작농 생활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고 생활도 궁핍했다. 지주와 소작 관계는 연해주에서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이들은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 문제 속으로 편입됐다. 결국 민족 문제와 계급 문제를 둘러싸고 고려인 사회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발생하게 된다.
푸칠로프카를 중심으로 한 수이푼(추풍) 지역 네 개 마을에서는 부유한 원호인 촌락이 발달할 수 있었다. 상해임시정부 교통부 총장(교통부 장관)을 지냈고, 최재형과 함께 연해주 고려인 출신 최고의 독립지사로 평가받는 문창범(1870~1934) 역시 푸칠로프카에서 성장했다.
그는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1877년 가난에 시달리던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했다. 푸칠로프카에서 성장하며 러시아어를 익혔고, 군납업으로 성공한 재산가가 되었다.

1910년 전후 조국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되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자 그의 민족의식도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우수리스크에서 일본에 항의하는 선전 격문을 작성하고, 러시아와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또한 고향인 이곳에 거액의 재산을 출연해 인재 양성을 위한 농민학교를 1916년 설립했다.
이어 1917년에는 ‘전러시아 한인총회(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조직해 러시아 지역 교포들의 대동단결 기반을 마련했다.
3·1운동 이전부터 그는 이미 극동 정세의 변화를 예견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로 개칭하고, 임시정부 성격의 조직을 최초로 구성할 정도로 그는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문창범의 지원으로 세워진 푸칠로프카 농민초등학교에서는 수많은 민족혁명가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조선의 명사들이 교사로 초빙되거나 지원하기도 했다.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회주의 작가 조명희 도 조선에서 탈출한 뒤 1931년 이곳의 교사로 부임했다.
이곳과 인접한 시넬리코보(영안평) 지역에서는 전설적인 여성 혁명가 김 알렉산드라(김애리·1885~1918)가 태어났다. 그녀는 한때 이곳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이후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길을 걸으며 한 시대를 장식했다. (이택순 네이버 블로그, 2026년 1월 12일 ‘김 알렉산드라- 아무르의 별이 되다’ 참조)
그들의 부모가 함경도 벽촌에서 기아와 탐학을 피해 러시아로 개척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함경도 산골에서 무지렁이 상놈의 삶을 벗어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가 방문한 ‘푸칠로프카 초등학교’는 학교 설립 이후 강제이주와 전쟁, 혁명을 겪으며 엄청난 변화를 맞았다. 스탈린 독재정권에 의한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는 이 지역에서 고려인의 흔적을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다. 문창범이 세운 학교 역시 학생이 사라지며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이 학교의 전통을 계승한 러시아 초등학교가 새롭게 건립되어 러시아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출입이 통제된 학교였지만 특별히 역사관 관람을 허락받았다. 학교 2층의 역사관에는 100년 전 고려인 졸업생들의 발자취가 보존돼 있었다.
이 학교가 배출한 졸업생들을 작은 역사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조명희 와 김 막심 파블로비치(소련 역사학계 저명 교수), 박 블라디미르 그레고리예비치(우즈베키스탄의 대기업가) 등의 사진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한무(북한 해군참모차장), 강상호(독립운동가·내무성 차관) 등 수많은 학자와 관료, 혁명가, 문학가가 이 학교에서 배출되었다.

마침 수업 중이던 어린이들이 복도로 나왔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 학교가 원래 고려인(카레이츠) 학교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90년 소련 붕괴 이후 일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귀향했지만, 현재 학교에는 한국계 학생이 한 명도 없고 모두 러시아 어린이들이었다.
그들의 해맑은 얼굴 속에서 20세기 초 고려인 어린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마치 100년 전으로 돌아가 그 시절의 아이들을 다시 만나는 듯했다. 인종과 국가를 넘어 어린이의 미소만큼 맑고 아름다운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선조들 또한 이런 해맑은 얼굴로 새로운 세상에서 큰 꿈을 키웠을 것이다.
푸칠로프카의 폐허 속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번영과 활로를 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