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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의 아무르 답사기 28] 소련 영웅이 된 고려인 장교 김유천…하바롭스크 거리에 남은 이름

하바롭스크 레닌광장, 평화와 전쟁의 교차로에서 평화의 상징 비둘기들이 모이를 찾고 있다

하바롭스크 시내 레닌광장에서 우리는 시내 번화가로 차를 이동했다. 최고의 번화가인 ‘칼 마르크스’ 거리와 평행하게 뻗어 있는 고풍스러운 거리가 ‘김유천 거리(표트르 김 울리짜)’이다. 고려인(러시아 국적 한인)의 이름 ‘김유천(표토르 김)’으로 명명한 거리가 어엿하게 도시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안내하는 조 선생도 그 자세한 내력은 모르는 듯하다. 한국인에게 매우 생소한 인물 ‘김유천’, 그는 누구일까?

어떤 연유로 소비에트 정부는 이 거리를 ‘김유천 거리’로 명명한 것일까?

‘김유천 거리’로 통하는 하바롭스크 번화가

김유천(표트르 김)은 1900년경 고려인 2세(러시아 국적 한인)로 연해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러시아 중등학교를 마치고 어린 나이에 시베리아 내전에 혁명군 대열로 뛰어들게 된다. 시베리아 내전(1918-1922)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일본군과 미·영 국제연합군이 반혁명군(백위군, 러시아 차르군)을 지원하면서 발발한 러시아 극동의 내전이었다. 러시아 혁명군(적군) 대 반혁명군-일본군 연합과의 전쟁이었다.

연해주로 정착한 고려인들에게는 혁명군과 반혁명군 사이에서 노선 선택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대부분의 고려인은 열악한 노동자·농민 신분으로 혁명군에 가담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여한다. 이들은 대일 항전에 참여한다는 독립운동의 의식과 러시아 내부의 노동자·농민 혁명에 동참한다는 이중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베리아 내전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충혼탑

러시아 혁명에 의구심을 가진 일부 유산자 계층과 제정 러시아 군에 소속해 있던 고려인들은 혼란의 와중에 백군(반혁명군)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 군인으로서 자기의 책무를 다한 제정 러시아 군 김인수(빅토르 김) 육군 소장이 그런 경우라 하겠다.(저자 블로그 2025.8.30 “빅토르 김의 영혼” 참조). 다수의 고려인이 러시아군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유럽 전선에서 희생되거나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김유천은 ‘혁명군(적군)’ 소속 소대장으로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했다. 러시아 내전은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군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이후 김유천은 소련군 장교 대대장급으로 하바롭스크 지역 극동군에 복무 중이었다. 그는 소련군으로 1929년 만주 군벌과의 아무르 북만주 전투에 또다시 참전하는 시대적 운명에 처한다.

레닌광장 러시아혁명 기념탑

1929년 소련군과 만주 군벌 장쉐량(장학량, 1898-2001)은 북만주(아무르 지역)에서 왜 전쟁을 벌이게 되었을까?

만주(동북3성, 흑룡강성·길림성·요녕성)는 중국 중원 본토와는 별개의 특수 지역으로, 19세기 후반부터 한반도와 더불어 동북아 지정학적 균형의 지렛대였다.

1905년 러일전쟁 후에는 제정 러시아와 일본 제국, 그리고 청 왕조의 패권이 만주에서 불안한 균형을 유지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고, 1911년 신해혁명 후 청나라가 멸망하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차르 체제가 붕괴하는 세기의 혁명이 발생했다. 당연히 만주에도 그 영향은 폭풍처럼 불어닥쳤다.

불안정한 균형 속의 만주 지역에 일본군의 후원으로 성장한 장쩌린(장작림, 1873-1928)이 장악한 만주 군벌이 대두되었다. 청나라 군인 출신 장쩌린은 봉천(펑톈, 선양)에 기반을 두고 ‘만주의 왕’을 자처했다. 촌락 자경단 수장에서 마적단으로, 만주 군벌로 성장한 장쩌린의 군벌이었다. 급격히 성장한 장쩌린은 30만의 군대를 보유하고 포병·함대·항공기까지 보유한 무시 못 할 만주의 권력으로 성장했다.

만주에는 기득권을 승계한 소비에트 러시아, 요동반도를 점령한 일본, 중국을 통일하려는 장제스(장개석, 1887-1975) 국민당의 구도 속에서 장쩌린의 만주 군벌은 지정학적 변동을 일으켰다. 손문의 군사 측근으로 1920년대부터 국민당 혁명군을 장악한 장제스는 남경과 북경의 중원 지역을 장악했으나,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세력이 급격하게 세를 확장하는 형세였다. 장제스 국민당은 만주 군벌 장쩌린을 중국 동북군으로 인정하고 중국군으로 편입하려 했다.

러시아가 건설한 전략 요충, 요즘의 하르빈

‘만주의 왕’을 자처했던 만주 군벌(봉천 군벌) 장쩌린이 1928년 일본군의 공작으로 남만주철도 펑텐 교외에서 폭사했다. 장쩌린의 아들 장쉐량(장학량, 1898-2001)은 권력을 승계하고 군권을 장악하였다. 군사력을 보강한 장쉐량은 러시아 혁명으로 취약해진 소련군의 약점을 공략하며, 소련이 소유하던 ‘중동철도(CER, Chinese Eastern Railway, 동청철도)’의 권리를 되찾으려 시도한다. 1929년 하얼빈 주재 소련 영사관을 습격하고 간첩 혐의로 외교관을 체포하며 ‘중동철도 관리권’을 접수한다. 이후 동북군 30만 명이 동원되었고, 소련 적군(Red Army)과 대규모 전쟁이 아무르강 연안에서 발생한다.

스탈린이 장악한 소련군의 강력한 반격이 이어진다.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이 이끈 소련 극동군 15만 명이 만주에 진격하며 만주리와 잘라이누르, 아무르강 연안에서 장쉐량의 동북군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현대화된 소련군의 전차·함대·항공기에 밀려 동북군(봉천 군벌)이 참패한다. 이를 일명 ‘봉소전쟁(봉천 군벌 대 소련 전쟁, Sino-Soviet Conflict)’이라 부르게 된다.

고려인 김유천은 봉소전쟁에 소련 극동군 기병연대의 대대장으로 참전하게 된다. 아무르강 유역 잘라이누르 전투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동북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전사한다. 김유천에게 소련 영예훈장인 적기훈장(Order of the Red Banner)이 수여되었고, 그가 주둔하던 부대의 소재지인 하바롭스크에 ‘김유천 거리’를 만들게 된다.

고려인도 다수가 포함된 광장의 전몰용사 충혼탑

17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이 아무르강을 침략할 때 청나라의 요구로 ‘나선정벌(러시아 정벌)’ 전쟁에 나서야 했던 조선이었다. 270년 후 국제 정세는 격변하며 조선인 김유천이 고려인이 되어 1929년 소련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아무르(흑룡강) 지역에서 장쉐량의 만주 군벌(동북군)을 격파하며 소련의 영웅이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한 반전이 발생한 것이다.

‘봉소전쟁’ 이후 장쉐량과 소련은 하바롭스크에서 의정서를 채택하고 ‘중동철도 관리권’은 소련으로 회복되었다. 이 전쟁으로 동북 군벌 장쉐량의 군사적 허약함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장제스)는 “만주에 군사적 지원을 할 능력이 없다”라는 사실도 입증되었다.

요동반도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은 이 전쟁을 예의 주시하면서 북만주 장악의 기회를 노린다. 관동군은 1932년 만주사변을 도발하여 만주를 전격적으로 장악한다. 장쉐량의 30만 명 전투부대는 일거에 무너져 내렸다. 미국과 국제연맹이 일본군의 철수를 종용했으나 힘 앞에 정의는 무너져 내렸다.

만주국을 설립한 일본의 영향력이 만주에서 결정적으로 확대되었다. 소련도 2년 뒤 1934년 일본과의 분쟁을 피해 일본에 ‘동중철도(동청철도) 관리권’을 매각하고 철수한다.

만주의 조선 독립운동은 지하로 스며들고, 독립지사들은 일본의 압박을 피해 상해와 중경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21세기 들어 MAGA(미국을 위대하게), 중국몽, 대슬라브주의(러시아)의 강대국 패권주의 앞에 세계는 또다시 술렁이고 있다.

북만주 아무르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바라본다!

하바롭스크 주정부 건물 앞에 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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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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