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 4월 5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새벽, 봄을 시샘하는 대륙의 한기가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고려인 거리에는 새벽 한기보다 더욱 소름 끼치는 공포의 군화발 소리가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새벽녘 창문을 깨고 문을 부수는 소란에 최재형(1860~1920, 러시아명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Пётр Семёнович Цой)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코고 거리 38번지의 최재형 가택에 무장한 일본군과 헌병이 들이닥친 것이다.
일본군은 저항하는 최재형을 결박해 끌고 간 뒤 재판도 거치지 않고 이틀 후 총살시켰다. 이날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연해주 전역에서는 조선인(고려인)을 대상으로 일본군의 광범위한 방화와 약탈, 학살이 이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4월 참변(신한촌 참변)’이었다. 일본군의 연해주 지역 고려인(러시아 이주 조선인) 학살은 어떤 과정 속에서 자행되었을까?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서방 열강은 군대를 파견해 러시아 극동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영토 확장에 야심을 품은 일본이 이른바 ‘국제간섭군’의 주력이었다.
사할린섬과 인접한 아무르강 하구의 니콜라옙스크(니항) 항구는 오호츠크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에는 일본 영사관이 설치됐고 일본군과 다수의 일본 거류민이 진출해 있었다.
1920년 2월부터 러시아 혁명군 과격파와 연해주 조선 독립군 세력이 반혁명군을 제거하기 위해 니항으로 진격했다. 이들은 반혁명군(러시아 백군)을 격파하고 니항의 일본군과 일본 거류민 세력을 두 달간의 전투 끝에 패퇴시켰다. 이를 빌미로 일본군은 연해주 전역에 걸쳐 조선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대숙청 작전을 전개했고, 고려인을 대량 학살하게 된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은 최신 군사 정보에도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일본군의 습격을 미리 피하지 못하고 끌려가 총살당해야 했을까?
함경북도 경원의 소작농 최홍백의 아들 최재형은 아버지를 따라 1869년 연해주로 이주했다. 갖은 고초 끝에 연해주 정착에 성공한 그는 고려인 최초의 도헌(자치기관장) 직책을 맡고,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영예까지 누렸다. 가난한 조국은 그의 가족을 연해주로 떠나게 만들었지만, 그는 조국을 혐오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국적자로서 현지 실정법을 준수하며 민족운동을 추진하는 방식을 택했다. 초기에는 기업 경영과 함께 고려인 학교를 다수 설립해 2세 교육을 지원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의 의병과 망명 지사들이 연추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는 항일운동 결사체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이범윤과 안중근 등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지원했지만 러시아 당국의 제재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했다.
최재형은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거처를 옮겨 언론기관과 사회단체를 만들고 민심과 여론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는 무장독립투쟁과 함께 외교적·경제적 자립 노선을 병행해야 한다고 본 안창호의 방식과도 유사했다.
최재형은 19세기 말 해외에 진출한 교민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재력을 축적한 인물이었다. 연해주에서 벌어진 거의 모든 독립운동에 그가 자금을 지원했고, 그의 경제력과 민족정신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으로 선임될 정도였다.
부자는 원래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늘 선두에 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를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상징이라 부르는 이유다.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에는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감시하는 공작 책임자 ‘키토 카츠미’(목등극기·일본 경찰요원으로 추정)라는 인물이 있었다. 키토는 조선인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자금 지원,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지원,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그 대부 최재형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최재형은 두만강 유역 얀치혜(연추), 생활 근거지인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제2의 고향 우수리스크에 여러 채의 집과 농장,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다. 키토는 최재형의 우수리스크 별장에 밀정을 보내 그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우수리스크로 피신한 최재형에게 위험하니 가까운 하얼빈이나 농촌 촌락으로 대피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최재형은 “내가 피신하면 우리 가족 모두가 잡혀간다. 내 피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가족 모두를 고문할 것이다. 나는 늙었지만 젊은 너희들은 살아야 한다. 차라리 내가 죽겠다”(딸 최올가의 회상)고 말했다.
그는 피습을 예상했지만 가족의 안전을 위해 끝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독립운동의 대부는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대부여야 했다.

참변 한 달 뒤인 1920년 5월 7일 자 동아일보는 “일본군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의 옛 명칭)에 침입하여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 최재형과 조선인 70여 명을 체포해 취조한 결과 최재형 등 4명은 총살시키고 다른 사람은 석방시켰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식민지 당국의 검열과 보도 통제로 피해의 극히 일부만 축소 보도된 것이었다.
후일 최재형의 딸 최소피아는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 공작 책임자 키토 카츠미(목등극기)를 아버지 살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그녀는 “키토를 암살해 기필코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늘 앞에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일본군의 습격으로 조선인(고려인)과 러시아인 1천여 명이 희생됐다.
국제법의 원칙도 질서도 무너진 채 오로지 ‘힘이 정의’였던 시대였다. 야만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과도 같았다. 독립운동이 전개되던 북만주와 연해주 아무르주의 현실은 이처럼 냉혹했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패권주의는 문명의 시대인 21세기에도 여전히 활개 치고 있음을 우리는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 당국은 4월 참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수이푼허 주변 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최재형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지만, 4월 참변 희생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을 함께 기리는 별도의 공간은 오랫동안 마련되지 못했다.
최재형과 그의 가족이 머물던 집은 단지 한 가족의 거처가 아니었다. 연해주 고려인 사회의 구심점이었고,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지원했으며 권업회를 조직하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던 장소였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러시아인의 소유가 된 건물은 90여 년 동안 겨우 골격만 유지한 채 퇴락해 갔다. 그러나 1990년대 소련 붕괴와 함께 찾아온 해빙기는 다시 최재형과 그의 유적을 역사의 무대 위로 불러냈다.
2010년 한국과 러시아 정부의 지원 아래 재외동포재단과 고려인 단체가 건물을 매입해 보수했고, 2019년 3·1운동 100주년인 3월 1일 정식 개관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이곳 ‘최재형기념관’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영원한 대부 최재형의 영혼을 기리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