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칼럼

[신정일의 시선] 장맛비에 다시 떠오르는 나의 어머니

신정일 모친 정병례 여사

어제는 하루 종일 장맛비가 내렸다. 바람에 흔들림도 없이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줄기 속에 지나간 추억들이 활동사진처럼 스쳐 지나가며, 문득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어머니다.

오래전 일이다. 2013년 2월, 어머니를 장지로 모시는 날 새벽, 하얀 눈이 펄펄 내렸다. 진안으로 가는 길이 눈 때문에 염려스러워 그만 좀 내렸으면 했지만, 눈은 멈출 줄 몰랐다. 쏟아지는 눈발을 헤치고 도착한 집. 며칠간 정리하지 못해 어수선한 책상을 치우고 어머니를 위한 애사를 지었다.

사흘장을 마치고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마지막 추모의 자리에서 온 가족이 모인 가운데 ‘어머니를 위한 애사’를 천천히 읽었다.

작가 신정일의 모친 정병례 여사

어머니 정병례의 애사

어머니의 이름은 병례, 나주 정 씨였다. 정병례의 아들 신정일이 이 제문을 올린다. 어머니는 스물한 살에 영산 신 씨 영철에게 시집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계사년(2013) 2월 초나흘 오전 아홉 시에 세상을 떠나셨고, 향년 87세였다. 남편의 고향인 진안군 부귀면 공원묘원에, 57세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과 함께 모시고자 한다.

어머니는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봉암리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계남리에 살던 신영철을 만나 결혼하였다.

남편과 네 살 차이였던 어머니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꿈꿨다. 그러나 시대가 어지러웠던 탓에 어머니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그 사이 세 아들과 외동딸을 낳아 키웠지만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자식들의 교육과 더 나은 삶을 위해 과감히 집을 나와 행상을 시작하셨다.

모진 가난과 고통의 세월이었다. 그 시련을 다 이겨내지 못하고 남편 신영철은 1981년 12월,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어머니는 아들들을 따라다니며 삶을 이어가셨다.

아들딸이 제각기 가정을 이루자 어머니는 함께 살림을 합쳤고, 여덟 명의 손주들을 애지중지 키우셨다. 그러나 좋은 일엔 탈이 따른다더니 결국 병마가 어머니를 찾아왔고, 원심원에 머무시다 전주 일양병원으로 옮긴 뒤 며칠 만에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 눈이나 비가 많이 내릴 때면 새벽부터 전화를 걸어 “오늘은 답사 나가지 말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지요. 해마다 새해가 되면 불공을 드리고 신년 운세를 보신 뒤 가족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며 복을 빌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따뜻한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기 그지없습니다.

자나 깨나 가족 걱정, 가족 자랑으로 사셨던 어머니. 이제는 그 모습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을 하면 더없이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그 질곡의 세월을 이겨내시며 입춘날, 봄은 온다는 진리를 남기고 떠나셨고, 지금 이 새벽, 흰 눈송이 같은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덧없고 허망하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 사랑과 인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인생의 큰 스승이셨습니다. 내세에서는 부디 모든 세상일 내려놓으시고 행복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세상이 힘들고 삭막할 때마다 어머니의 빈자리가 더욱 사무치게 그리울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더 커지고, 가슴이 텅 빈 듯 무너져 내리는 듯, 그저 슬픕니다. 아, 슬프고 또 슬픕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그렇게 다정히 부르시던 사람들이 다 모여 있으니 굽어살피시고 영원히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계사년 이월 초엿새. 상향.

애사를 읽으면서 울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목이 메어 끊기고 울먹이며 끝까지 읽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 아버지와 어머니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돌아보면 행복했던 시절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아버님이 생존하셨던 동안 화목하고 단란한 기억은 거의 없다. 평생 가난에 허덕였기에 자식 교육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매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게다가 놀기 좋아하시던 아버님이 술과 도박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으셨으니, 아무리 현모양처라 해도 그 집안을 꾸려나가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살아서 화목하지 못했던 부모님이 저세상에서는 부디 행복하시길 바라지만, 그 바람이 현실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때로부터 열두 해가 강물처럼 흘러갔다. 이 비 내리는 아침, 나는 다시 그 시절을 떠올린다.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신정일

문화사학자, '신택리지' 저자, (사)우리땅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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