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신정일의 시선] 24년 전 만난 안동댐 수몰민들, 지금 어디서 무엇을?

도산서원

도산서원을 지난 분천리에서 송티재를 지나 어둠 내리는 서부리에 이른다. 저녁 7시 10분 민속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중앙여인숙에 숙소를 잡았다. 안동댐이 준공된 후 지어진 듯한 여인숙은 낡을 대로 낡았다. 옛 예안에서 이주할 때 땅을 불하받은 곳에 지은 집이란다. 그때 보상을 얼마나 받았느냐는 말에 그때 땅 한 평에 1900원, 2000원씩 받아 가지고 왔는데 작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주는 대로 받아 올라왔단다. 곰팡이 냄새인가, 오랫동안 사람의 흔적이 끊어진 방 냄새인가. 무엇인가 분명치 않은 이상야릇한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데도 주인장이 펴놓은 이불을 덮는다.

안동호 그 때 그 시절

언제쯤 샀는지 모르는 TV는 아예 기척도 없고 전기 스위치마저 방 안에 없다. 불을 켤 때는 문을 열어야 하고 불을 꺼야 할 때도 방문을 열고 나가서 꺼야 한다. 축축하게 비는 내리고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문득 나는 외롭다. 나는 이렇듯 멀리 떠나왔구나. 나를 이렇듯 낯선 땅 낯선 여인숙에서 잠을 못 이룬 채 빗소리를 듣게 만든 그 연유는 무엇일까? 안동호의 상류 서부지구에서 보낸 그 밤은 길고도 길었다.

밤새워 비 내린 줄 알았는데 언제 내렸냐는 듯이 아침 하늘은 푸르다. 내가 하룻밤을 지낸 예안은 옛 시절에 현이었다. 본래 고구려의 매곡현(買谷縣)이었던 예안현(禮安縣)은 신라 때 선곡(善谷)으로 고쳐서 나성군(奈城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 성주(城主) 이능선(李能宣)이 의거하여 귀순하였으므로 예안(禮安)으로 고쳐서 군으로 승격되었다. (…)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안동군에 편입되었고, 현재 예안, 도산(陶山), 녹전(祿轉)의 3개 면의 지역이 되었다가 안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안동호

여장을 꾸리고 밖으로 나서보니 오늘이 장날이란다. 아직 초장인데도 일찌감치 나와 서성거리고 있는 나이든 어르신들에게 낙동강의 옛날이 어떠했는지를 묻는다. “예안읍이라고 불렀을 때 그때만 해도 낙동강물이 좋았지요. 낙동강물을 길어다 물을 먹었는데 사람들이 지금은 저 물을 안 먹는 기라. 저 위에 있는 상수도 물을 먹지. 예안 장이 크기는 컸어, 예안 장 가지고 네 장을 갈라놨으니.”

장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까, 장을 기웃거리고 있지만 사람들이 모일 것 같지가 않다. “장이 잘 안돼요. 안동장이 가까워서 안동 가는 차비나 여기 오는 차비나 다 똑같은데 여기 뭘라고 오겠어요. 옛날에는 장사가 잘 되었는데.” 혼잣말인 듯 푸념인 듯 말을 건네는 슈퍼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서부 2리 나그네식당에서 메밀국이 곁들여진 아침을 먹는데 아무래도 내 식성에는 맞지 않다. 물 한 그릇 달래서 밥을 말아먹자 주인 아주머니는 그 맛있는 것을 왜 안 먹느냐는데, 나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벽에는 사진작가 황헌만 선생이 찍은 1975년의 예안읍 풍경들이 흑백사진으로 걸려 있다.

70년대 통기타를 앞에 놓고

낙동강 변의 초가집에서 대여섯 살배기 아들을 가슴에 안고 예닐곱 먹은 아들은 도꾸리를 입고 서 있는 그 사진에서 나는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착각에 빠진다. 아버지가 하늘 같았고 그 아버지 품에 안기면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던 어린 시절, 때꼬장물이 주르르 흐르면 소매로 쓱 닦고도 웃을 수 있었던 시절. 그래, 그 시절이 꿈같은 그 시절이 어디로 가버렸는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내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나는 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보며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그리워할 뿐이다.

서부시장의 아침은 부산하다. 옷가지를 파는 사람들, 마늘에서 포도, 복숭아, 고구마까지 그 좁은 장터에 빼곡하게 장을 펴놓은 사람들은 늦은 아침밥을 먹고 있다. 나는 천천히 선착장으로 내려간다. 녹조가 잔뜩 낀 안동호는 아침 안개가 아직 가시지 않았고 먼데 산들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동부, 부포에서 온 여객선에서 나이 든 몇 사람이 내리고 선장은 올해엔 유난히도 녹조가 많이 낀다고 푸념하지만 녹조가 많이 낀 이유는 상류 쪽 축산농가의 폐수와 생활하수가 처리되지 않으면서 강 하류로 쏟아지는 탓이라고 한다. 저 녹조가 걷히기 위해선 큰 비가 한번 내리거나 기온이 쑥 내려가야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사진 신정일

안동댐 관리부장 손철호씨의 말에 의하면 “안동댐 상류에 필요한 기초시설은 최소한 10곳인데 현재 그곳에만 설치돼 있다”며 “부레옥잠을 심어 수질정화에 나서지만 질소, 인의 경우 BOD 처리는 50% 수준에 못 미치는 형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낙동강물의 오염이 어디 녹조뿐이겠는가. 오죽했으면 “안동 똥물 대구사람이 먹고, 대구 똥물 부산사람이 먹는다”는 말이 한때 회자됐을까?

안동댐 관리사무소에서 나를 태우고 갈 배가 열시나 열시 십분쯤 도착하겠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아직 시간이 이르다. 다시 올라간 서부시장에는 아까보다 조금 많은 사람들이 어슬렁거리지만 그 옛날의 번성했던 시골장터를 떠올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40대마저 찾아볼 수가 없고 평균연령이 70대쯤 되어 보이는 시골장터에 무슨 생기가 있겠는가. 그래도 어물장에선 이 근방 제사상에 꼭 올려놓는다는 상어 한 토막에 간고등어 한 손을 사는 할머니의 손길이 있고, 손님이 없는데도 토란대를 부지런히 벗기고 있는 할머니의 손길은 쉴 틈이 없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데 느닷없이 비가 내린다.

안동댐 수몰지구

작살로 찔렀다 하면 은어가 올라왔다

선착장 사무실에서 잠시 비를 피하는데, 모시옷을 정갈하게 입으신 노인이 서 있다.
“어디 사시는데 여기 계세요?”
“저 건너 천천리 사는데 예안에 왔다 가는 길입니다.”
“안동댐 만들기 전에 이곳에 고기가 많았습니까?”
“댐 만들기 전에는 작살로 찔렀다 하면 은어가 은빛으로 빛나며 잡혀 올라왔어요. 댐이 만들어진 후에는 은어를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베스나 블루길 같은 외래어종들만 판을 치고 있어요. 그때 이곳에 살던 사람들 거의 다 나갔지요. 그때 나간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았어요. 집도 사고 땅도 사고 해서 나간 다음 부자된 사람 많아요. 그때 안 나가고 지금 서부단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소득이라곤 없고 힘들게 살고 있지요. 대통령 말 한마디에 더 달라는 소리도 못 하고 주는 대로 받았지요. 고향 지키겠다고 안 나간 것이 후회가 되지요.”
“선생님 자녀분들은 어디 사는데요?”
“서울에서 살고 있지요. 그 아들이 서울로 오라고 해서 갔는데, 회사에 간 아들은 저녁에나 오지, 손자들도 학교 간다 학원 간다 저녁에나 오지. 잠시 나가서 살아봤는데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그래서 내려와 버렸지요. 집사람 재작년에 좋은 데로 가버렸지. 그런디 뭐하러 가겄어요. 그냥저냥 여기 살다 가는 거지 뭐.”

예안면 천천리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는 김영선옹(2001년 당시 81세)의 말을 들으며 내 마음은 아침부터 어둡기만 하다. 쓸쓸하고 어두운 마음에 이동순 시인이 ‘물의 노래’에서 낙동강 수몰민을 노래한 시 한 편이 떠오른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
죽어 물이나 되어서 천천히 돌아가리.
돌아가 고향 하늘에 맺힌 물 되어 흐르며
예 섰던 우물가 대추나무에도 휘감기리.
살던 집 문고리도 온몸으로 흔들어보리.
살아생전 영영 돌아가지 못함이라
오늘도 물가에서 잠긴 언덕 바라보고
밤마다 꿈을 덮치는 물 꿈에 가위 눌리니.
세상 사람 우릴 보고 수몰민이라 한다.
옮겨진 낯선 곳에 눈물 뿌려 기침 메고
거친 땅에 솟은 자갈돌 먼 곳으로 던져가며
다시 살아 보려 바둥거리는 깨진 무릎으로
구석에 서성이던 우리들 노래도 물속에 묻혔으니.
두 눈 부릅뜨고 소리쳐 불러 보아도
돌아오지 않은 그리움만 나루터에 쌓여갈 뿐
나는 수몰민, 뿌리째 뽑힌 던져진 사람.
마을아, 억센 풀아, 무너진 흙담들아,
언젠가 돌아가리라. 너희들 물 틈으로
나 또한 한 많은 물방울 되어 세상길 흘러 흘러
돌아가 고향 하늘에 홀로 글썽이리.

그들뿐이겠는가. 그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갤갤하던 비가 다시 내린다. 호랑이가 아침부터 장가를 가는 것일까? 경북 704호, 경북 705호 배들은 아직 출항할 시간이 안 되었기 때문에 미동도 않은 채 안동호에 떠 있고 안동시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거린다.

“정부에선 그래도 댐을 만든 뒤에 물 부족 문제, 전력 문제, 홍수 문제 등의 이익이 있었잖아요. 그 이익을 수몰민에게도 주어야 하는데 하나도 해준 게 없어요. 나쁘게 말하면 수자원공사가 봉이 김선달보다 더한 것 같아요.” 그때 안동시의 6개 면, 2개 동, 36개 리에 살고 있던 3134세대, 20,664명의 사람들은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갔어요. 그 뒤에 이곳은 온도가 낮아지고 안개가 자주 끼게 되었어요.”라고 말하는 지역 주민들이 말이 아니더라도 수몰 지역 사람들의 피해와 피폐해진 자연환경을 무엇으로 보상해 줄 수 있을까?

겁도 없이 혼자서 낙동강을 걸었던 때로부터 24년의 세월이 흘렀구나. 그때 낙동강을 걸으며 만났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살아가고 있을지.

안동댐 수몰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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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문화사학자, '신택리지' 저자, (사)우리땅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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