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칼럼

[추모] 최형우,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집 찾아간 정치인…『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

원영일 여사와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사진 최영훈 전 동아일보 기자>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10월 24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였고, 6선 국회의원이었으며, 4·19혁명에서 출발해 한국 민주화운동과 문민정부의 출범에 참여했던 정치인이었다.

그의 별세 소식을 접하면서 오래전 읽었던 최형우의 자전적 에세이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다해출판사, 1993년 9월 1일 발행)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정치적 고비도,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낸 이력도 아니었다. 낙선한 정치인이 산중턱의 몇 가구를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최형우는 경남 양산에서 재선에 도전했다가 낙선한 뒤 어느 날 산중턱에 집 몇 채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비서에게 그곳으로 차를 몰라고 했다. 비서는 사는 사람이 서너 명밖에 없는데 굳이 찾아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했다.

그때 최형우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곳에 가서 주민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라는 취지로 답했다. 정확한 문장까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 일화가 내게 남긴 울림만큼은 분명하다. 최형우의 태도가 이후 나의 생각과 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정치인이 찾아가는 곳은 대개 사람이 많이 모인 장소다. 표가 많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이다. 그러나 최형우가 향했던 곳은 단 한 가구가 살아가는 산중턱이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도 누군가는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발걸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권력을 얻는 일인가, 사람의 말을 듣는 일인가. 오래전 자서전에서 만난 그 장면은 지금도 내게 이 질문을 던진다.

1935년 울산에서 태어난 최형우는 부산공고와 동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동국대 학생 대표로 참여했다. 1968년에는 ‘4·19 6·3범청년회’ 사무총장을 맡았고,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반대운동에도 나섰다.

1970년 김영삼을 만난 그는 이듬해 울산·울주에서 신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8·9·10·13·14·15대 국회의원을 지낸 6선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김영삼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김동영 전 정무제1장관과 함께 ‘좌동영 우형우’로 불렸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고문과 탄압을 겪었고, 1980년 신군부 집권 이후에는 의원직을 잃었다. 군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고초도 겪었다. 이후 민주산악회와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활동하며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이어갔다.

1990년 3당 합당은 그의 정치 인생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군사정권과 싸웠던 야당 정치인이 집권세력과 손을 잡는 선택이었다. 3당 합당을 둘러싼 비판과 논쟁은 오늘날에도 한국 정치사의 중요한 평가 대상이다.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2008년 10월 2일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부친 고 김홍조옹 빈소가 마련된 경남 마산 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YS와 반갑게 만나고 있다. YS는 최 전 장관을 만나자 마자 “몸도 불편한데 뭐할라꼬 왔노”라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부산일보>

그는 이후 정무제1장관과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내무부 장관 등을 지내며 김영삼 정부를 뒷받침했다. 문민정부의 개혁 과정에 참여했고, 고향 울산의 광역시 승격에도 힘을 쏟았다.

1997년에는 대통령선거에 나설 수 있는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됐다. 그러나 그해 3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정치적 도전은 사실상 멈췄다. 이후 약 29년 동안 이어진 투병은 그의 인생 후반부를 차지했다.

그 긴 세월을 함께한 사람은 부인 원영일 여사였다.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아시아엔 2023년 10월 7일자 글에서 두 사람의 삶을 조명했다. 원 여사는 동양화를 전공하고 국전에도 입선했던 화가였다. 그러나 남편의 정치활동과 투병을 뒷바라지하면서 오랫동안 붓을 놓아야 했다.

그 글에는 원 여사가 전한 남편의 말도 등장한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까닭은 적은 양의 소금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걸어온 정치와 민주화의 길을 소금의 역할에 빗댄 말로 읽힌다.

그 말에는 평생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의 자부심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의 신념 뒤에는 가족이 감당해야 했던 오랜 희생도 있었다. 한 사람의 정치적 생애를 평가할 때 그 곁을 지킨 사람들의 삶을 함께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2015년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별세했을 때 최형우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빈소를 찾았다. 영정 앞에서 주저앉아 오열하던 모습은 오랜 정치적 동지 관계가 남긴 세월의 무게를 보여주었다.

그는 김영삼보다 11년을 더 살았다. 2023년에는 뒤늦게 4·19혁명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생전에 국립4·19민주묘지에 안장되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최형우가 걸어온 길을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다.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행적과 3당 합당 이후 집권세력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행적은 함께 살펴봐야 한다. 그것이 역사 속 정치인을 기억하는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오래도록 간직해 온 것은 그의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 자전적 에세이에 나오는 일화다. 산중턱에 사는 몇 사람의 말을 들으러 가자는 정치인. 사람이 적다는 이유로 그곳을 굳이 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비서의 반대. 이를 무릅쓰고 “그 한 분이 바로 내가 정치하는 이유이며, 정치는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며 기어이 그 한 사람을 찾아간 최형우.

그 한 사람을 지나치지 않았던 정치인. 선거에서 이기고 지는 것보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사람.

최형우의 그 일화는 정치와 언론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정치인은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박수받는 일만으로 국민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고,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이야기를 듣는 데서 정치의 본령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별세 소식을 접한 오늘, 오래전 읽었던 최형우 책의 한 장면이 다시 또렷해진다.

최형우 전 장관의 명복을 빈다. 긴 세월 고인의 곁을 지킨 원영일 여사와 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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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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