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사북항쟁 46주년③] 노사정 합의 뒤 시작된 검거와 고문…사북에 남은 46년의 상처

1980년 4월 사북민주항쟁 당시 정선경찰서 고한지서에 배치된 진압 병력. 광부와 주민들의 항쟁이 이어지던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사진=정선지역사회연구소

수백 명 연행·31명 군사재판 유죄…재심 무죄에도 다수 피해자 확인·구제 과제 남아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에서 발생한 사북항쟁은 오랫동안 과격한 노동분규로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 지프차 돌진으로 촉발된 항쟁과 노사정 합의 이후 이어진 연행·고문 등 국가폭력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2026년 8월 대통령의 공식 사과에 이어 10월 21일 제46주년 기념식에서 처음으로 대통령 기념사가 전달됐다. 아시아엔은 정선지역사회연구소가 발간한 『사북항쟁 일문일답』과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사건의 발단과 전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삶, 진실규명과 화해의 과제를 5회에 걸쳐 살펴본다. 자료집의 해석과 공식 조사에서 확인된 사실은 구분해 전한다. <편집자>

1980년 4월 24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에서는 나흘 동안 이어진 광부들의 항쟁이 노사정 합의로 마무리됐다. 경찰이 복귀했고 광부들은 농성을 해제했다. 며칠 뒤 광업소 조업도 재개됐다. 주민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눈이 내려앉은 사북 광부들의 조형물. 갱도에서 힘겨운 노동을 이어가던 광부들의 모습을 재현한 작품으로, 탄광 노동자들의 고단했던 삶과 사북의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당시 계엄당국은 사북항쟁에 참여한 광부와 주민들의 신원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경찰과 정보기관이 작성한 여러 명부에는 검거 대상자의 이름과 주소, 가족관계, 활동 내용 등이 기록됐다. 정선지역사회연구소(소장 황인욱)가 발간한 『사북항쟁 일문일답』에 따르면 4월 30일 무렵에는 사북사건 관련자 명단이 작성됐고, 5월 6일부터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항쟁은 끝났지만 국가권력의 수사와 처벌은 이제 시작된 셈이었다.

1980년 사북항쟁 당시 정선경찰서 합동수사단 임시조사실 공간 배치도. (정선지역사회연구소 제공)

당시 광부와 주민들은 정선경찰서 임시조사실 등으로 연행됐다. 조사 과정에서는 폭행과 고문, 허위 자백 강요 등이 이루어졌다. 사북사건에서 특히 주목되는 대목은 집단고문 문제다. 자료집은 피해자들이 다른 사람의 고문 장면과 비명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상황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남성과 여성 피해자들이 서로의 고통을 목격하는 상황은 개인에게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남겼다. 당시 여성 피해자들을 상대로 한 성적 폭력과 모욕적인 행위에 대한 증언도 이어졌다.

국가폭력의 피해는 조사실에서 끝나지 않았다. 연행과 고문을 겪은 사람들은 이후에도 직장을 잃거나 지역사회에서 낙인과 차별을 경험했다. 일부는 고향을 떠났고, 가족관계가 흔들리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군사재판도 이어졌다. 자료집에 수록된 연대기에 따르면 1980년 5월 26일 사북사건 관련자 91명이 원주 101헌병대 영창으로 이송됐다. 이후 31명이 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이 판결 가운데 일부는 재심을 통해 뒤집혔다.

2015년 이원갑과 신경이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이후 다른 사건 관계자들에 대해서도 재심 무죄 판결이 이어졌다. 자료집은 2015년부터 2023년까지 모두 8명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인정받았다고 정리했다. 사법적 판단이 달라진 것은 당시 처벌의 정당성을 다시 살펴보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재심 무죄가 모든 피해자의 삶을 회복시켜 준 것은 아니었다.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 장기간의 실직과 경제적 어려움, 가족들이 겪은 상처는 판결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더 큰 과제는 피해자 전체의 규모조차 충분히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선지역사회연구소가 당시 경찰과 정보기관의 여러 명부를 분석한 결과, 중복을 고려하더라도 확인되는 연행자 명단은 180명을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자료집은 실제 조사와 고문을 겪은 광부·주민의 수가 최소 2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이 수치는 연구소가 관련 기록을 종합해 제시한 추산으로, 모든 피해자가 공식 조사에서 확인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4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피해자는 사망했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도 많다. 국가폭력 피해를 겪었지만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특히 당시의 상처는 자녀와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문을 겪은 뒤 이전과 달라진 부모의 모습을 지켜본 자녀들, 지역사회에서 오랫동안 사건에 대해 말하기 어려웠던 가족들에게 사북항쟁은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었다.

1980년 사북민주항쟁 당시 도로 옆 비탈에 전복된 차량들. 현장의 긴박했던 상황과 광부·주민, 경찰 사이 충돌 흔적을 보여준다. <사진 영화사 느티>

2008년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사북사건을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명하고 국가 사과와 피해자 구제를 권고했다. 2024년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도 관련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공식 사과, 명예회복과 기념사업 등을 권고했다. 그럼에도 기존 조사와 재심을 통해 구제받은 사람은 전체 피해자로 추정되는 규모에 비해 일부에 그친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미 확인된 피해자에 대한 후속 조치뿐 아니라 조사 대상에서 빠졌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도 중요하다. 기존 자료를 재검토하고 생존 피해자와 유족의 증언을 추가로 확보하는 한편, 필요한 경우 관계 법령에 따른 직권조사와 지원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들의 고령화도 고려해야 한다. 사과와 명예회복이 늦어질수록 당사자가 생전에 그 결과를 확인할 기회는 줄어든다. 사북사건의 국가폭력은 1980년의 조사실에서 발생했지만, 그 영향은 수십 년에 걸쳐 개인과 가족의 삶에 남았다.

21일 강원 정선군 뿌리관에서 열린 사북민주항쟁 제46주년 기념 간담회 ‘그날의 기억, 오늘의 대화’에서 참석자들이 사북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최승준 정선군수 발언을 송상교 진실화해위원장(왼쪽 두번째)과 황인오 사북민주항쟁동지회장(오른쪽) 등이 경청하고 있다.

46년 만에 이루어진 대통령의 공식 사과는 중요한 진전이다. 그러나 그 사과가 실질적인 피해 회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국가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도 살펴야 한다. 사북에서 진실규명이 끝났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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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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