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저격능선전투’ 전승·위령제…호박떡과 군가, 그리고 ‘국화 한송이’

저격능선 전투 전승·위령제를 다녀와서
10월 24일 아침 8시,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45인승 버스는 빈자리 없이 찼다. 총무가 뜨끈뜨끈한 호박떡을 나누어 주었다. 철원으로 향하는 동안 회장은 참가자들을 한 사람씩 소개하며 누구인지,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참가자들 가운데는 참전용사의 가족도 있었고,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감독도 있었다. 화령장기념관에서 독립 제17연대의 부대기와 연대가를 본 인연으로 초청받은 손님도 있었다. 호박떡을 얻어먹었으니 떡값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멸공의 횃불」을 불렀다. 요즘은 제목도 「승리의 횃불」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이크 없이 부른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철원 쉬리공원에서는 제17여단과 독립 제17연대 전우회가 주관하는 제74주년 저격능선 전투 전승·위령제가 열렸다. 승리를 기리는 자리이면서 전사한 이들을 추모하는 자리였다. 행사장 한쪽에는 호국영웅을 위한 빈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흰 국화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두 분의 노병이 참석했다. 1930년생 노병은 휠체어를 타고 왔다. 그러나 헌화와 분향을 마친 뒤 추도사를 또렷하게 읽었으며, 거수경례도 반듯했다. 세월은 몸을 휠체어에 앉혔지만, 전우를 기억하는 마음까지 앗아가지는 못한 듯했다.

1932년생 노병은 두 발로 걸어 행사에 참석했다. 치아가 좋지 않아 얼굴 모습은 달라졌지만 걸음은 씩씩했다. 장사상륙작전에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분이었다. 예전에 장사상륙작전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생존자가 세 분 남아 있다고 소개된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 한 분을 실제로 만난 셈이었다. 기념관에서 읽었던 역사가 한 사람의 얼굴과 걸음걸이를 얻었다.
문득 걱정이 앞섰다. 이분들마저 돌아가시면 어떻게 될까.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언젠가 멈출 것이다. 전투 기록과 사진은 남겠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 먼저 떠난 전우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 전할 것인가.
그날 행사에는 전쟁의 기억을 이어가는 가족들도 있었다.
1949년생 예비역 소령은 한국전쟁 당시 제17연대 소속으로 전사한 아버지를 기억하는 헌시를 낭독했다. 시 속의 어린아이는 들판에서 동무들과 병정놀이를 한다. 동네 어른들이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고 묻자 아이는 대답하지 못한다. 엎드려 총을 쏘는 시늉을 하다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들판을 가로질러 어머니에게 달려간다.
세월이 흐른 뒤 아이는 장교가 되기 위해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집을 떠난다.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의 슬픔은 성장한 뒤에도 이어진다. 전쟁은 전장에서 끝나더라도 한 가족의 삶에서는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가족 일곱 명도 지방에서 올라와 위령제에 참석했다. 아버지는 화령장 전투에서 공을 세워 훈장을 받았지만,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화령장 전투기념관에서 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했고, 훈장을 받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날은 아들과 손자, 며느리가 함께 추모의 자리를 찾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공적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 기록은 기념관에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은 기념관에서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만났다. 가족 안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가 공공의 기억을 통해 후손에게 돌아온 것이다.
전승과 위령은 한자리에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한 전우를 기억했고,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시를 읽었으며, 아버지의 공적을 뒤늦게 알게 된 가족은 함께 추모의 자리를 찾았다. 전쟁의 기억은 훈장에 남기도 하고, 한 편의 시에 담기기도 하며, 늙은 병사의 거수경례 속에서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승리전망대를 둘러보고 버스에 올랐다. 아침에 따뜻한 호박떡을 먹으며 군가를 부르던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을 안고 돌아가고 있었다.
참전용사들이 한 분씩 세상을 떠나면 그들의 기억은 어떻게 될까. 기록을 보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기록 앞에 서서 누군가의 삶을 다시 발견하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기념관에서 아버지의 사진과 훈장을 발견한 아들처럼, 언젠가 다른 누군가도 기록 속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