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시아사회칼럼

[중동 기자의 9·11 회고] 바레인에서 보도한 뉴욕의 비극…“내가 올랐던 쌍둥이빌딩이 무너졌다”

이 글을 쓴 하비브 토우미(Habib Toumi)는 현재 아시아엔(The AsiaN) 영문판 편집장이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던 당시 그는 바레인 마나마의 영문 일간지 Bahrain Tribune 부편집장으로 근무하며 다음 날 신문 제작을 책임지고 있었다. 세계무역센터는 그에게 낯선 건물이 아니었다. 1978년 뉴욕을 방문했을 때 직접 올라가 보았던 쌍둥이빌딩이었다. 48년 전 뉴욕에서 마주한 세계무역센터의 기억, 25년 전 마나마 편집국에서 속보를 받아들며 신문을 다시 만들었던 긴박한 밤, 그리고 2026년 현재 아시아엔 영문판 편집장으로서 되돌아보는 9·11의 의미를 하비브가 직접 기록했다. <편집자>

1978년 뉴욕을 찾은 하비브 투미(사진 속 인물). 허드슨강 너머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이 보인다. 그는 23년 뒤인 2001년 9월 11일 바레인 마나마 편집국에서 두 빌딩이 무너지는 뉴스를 제작했다.

1978년 뉴욕의 기억, 2001년 마나마 편집국의 밤, 그리고 2026년의 회고

2001년 9월 11일 오후, 나는 바레인 수도 마나마의 신문사로 차를 몰아 급히 달리고 있었다. 라디오는 켜져 있었다. 채널을 계속 바꾸며 1만600km 떨어진 뉴욕과 워싱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보도는 단편적이었고 내용은 계속 바뀌었다. 그러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다음 날 신문 제작을 책임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 이미 1면을 머릿속에서 바꾸고 있었다. 네 대의 납치 여객기와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 워싱턴 펜타곤 공격으로 1면을 채우기로 했다. 안쪽 면도 여러 페이지를 할애해야 했다. 국제뉴스와 스포츠, 연예기사도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날은 다른 무엇보다 이 사건이 중요했다.

하지만 나에게 9·11은 단순한 국제뉴스가 아니었다. 십대 시절 나는 뉴욕에서 약 27마일 떨어진 뉴저지주 파시파니에서 살았다. 뉴욕에 여러 차례 갔고 처음부터 그 도시를 사랑했다. 거리의 에너지, 수많은 사람과 언어와 문화, 꿈이 뒤섞인 모습이 좋았다. 이후 40개국 넘는 나라를 다녔지만 내 마음속에서 뉴욕을 대신한 도시는 없었다. 1978년 어느 날 나는 세계무역센터에 올랐다. 건물의 규모와 건축에 놀랐고 빠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신기했다.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뉴욕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웃으며 사진을 찍고 멀리 보이는 명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십대였던 나에게 그곳은 마법과도 같았다. 뉴욕은 한계가 없는 도시처럼 보였고, 쌍둥이빌딩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발생한 9.11 테러사건. 이후 세계질서 재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3년 뒤 나는 마나마로 달려가며 바로 그 빌딩이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 있었다.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그날 아침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 가족에게 인사하고 자동차와 기차,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탔고 누군가는 걸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저 하루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도 무고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겨냥한 공격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쌍둥이빌딩도 내게는 단순한 철골과 콘크리트, 유리로 세운 건물이 아니었다. 더 높이 오르고 더 큰 꿈을 꾸려는 인간의 상상력과 의지,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의 상징이었다.

신문사에 도착하자 기억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곧바로 편집회의를 열었다. 편집국에는 긴박감이 감돌았다. 기자들은 TV 화면과 국제통신사 속보를 지켜봤다. 뉴욕과 워싱턴의 상황, 사상자 수, 미국 정부 발표, 세계 각국의 반응을 하나씩 확인했다. 새로운 사실 하나가 들어올 때마다 제목이 바뀌었다. 숫자가 달라지면 기사를 다시 썼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걸러냈다. 방금까지 사실로 보였던 내용이 다음 순간 수정되기도 했다. 사건은 급속히 전개됐지만 전체 모습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마감시간은 계속 다가왔다.

그 순간에도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수많은 독자들이 신문을 펼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확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우리가 할 일은 충격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정확하고 공정하고 충실하게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인쇄소로 마지막 지면을 넘길 때쯤 우리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인간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역사가 감당하기 힘든 순간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기자가 그 자리에서 물러날 수는 없다. 만들어야 할 신문이 있었고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었다.

나는 오랜 기자 생활 동안 전쟁과 정치적 격변, 인간의 비극과 대형 재난을 취재했다. 세상이 한순간에 방향을 바꾸는 듯한 장면도 여러 차례 지켜봤다. 하지만 2001년 9월 11일은 여전히 내 기자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하루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2026년, 그날을 다시 돌아본다. 1978년 나는 쌍둥이빌딩에 올라 뉴욕을 내려다봤다. 23년 뒤 마나마 편집국에서 그 빌딩이 무너지는 뉴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25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그날 나는 단지 뉴욕에서 벌어진 사건을 보도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걸었던 거리, 내가 올려다봤던 빌딩, 그 안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함께 떠올리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에서 무너지고 있던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내 기억의 일부도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날 오후 라디오는 뉴욕의 비극을 마나마의 내 차 안으로 전했다. 저녁이 되자 편집국은 그 소식을 신문 지면으로 옮겼고, 다음 날 아침 그 지면은 세계를 바꾼 하루의 무게를 안고 독자들에게 전달됐다. 9월 11일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과거 미국의 또 다른 국가적 재난을 두고 표현했듯 오래도록 “치욕 속에 기억될 날”로 남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뉴스가 한 기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겹쳐진 날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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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브 토우미

바레인뉴스에이전시 선임기자, 아시아엔 영문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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