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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와 원효가 만난 지점…”논쟁에도 품격이 있다”

에라스무스와 원효는 서로 만난 적도 없고, 같은 신앙과 철학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한 사람은 르네상스 유럽의 기독교 인문주의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통일신라의 불교사상가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한 가지에서 깊이 만난다. 상대를 이겨 침묵시키기보다 대화를 통해 더 넓은 진실을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490년이 지난 오늘, 나는 다시 에라스무스를 떠올린다. 그리고 문득 원효도 함께 떠오른다. 시대도 다르고 언어도 달랐지만, 두 사람은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당신은 논쟁에서 이기려 하는가, 아니면 진실에 가까워지려 하는가.”-본문에서 <AI 생성 이미지>

오늘은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가 세상을 떠난 지 490년이 되는 날이다. 학생 시절 그의 <우신예찬>을 읽으며 몇 번이나 무릎을 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저토록 명석하고도 유쾌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는 웃음을 무기로 삼았지만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 그의 풍자는 상대를 궁지로 몰기 위한 칼이 아니라, 인간의 허영과 독선,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까지 비추는 거울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한가운데 살았다. 교회의 부패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증오를 부추기지는 않았다. 개혁을 원했지만 분열은 원하지 않았다. 극단의 시대에 그는 중용을 선택했다. 그래서 때로는 우유부단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회색의 타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중과 평화였다.

나는 격렬한 언행보다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강한 신념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념이 강할수록 상대의 말도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원효는 화쟁(和諍)을 말했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적당히 절충하자는 뜻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견해가 왜 생겨났는지를 먼저 이해하고, 그 안에 담긴 진실을 찾아 더 높은 차원에서 만나려는 지혜였다. 화쟁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는 태도였다.

몇 해 전 나는 원효의 화쟁을 둘러싼 지상 논쟁에 참여한 적이 있다. 화쟁은 이상인가 현실인가를 두고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누구의 주장이 옳았는가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서로 다른 문헌을 읽고, 근거를 제시하며, 상대의 논리를 이해하려 애썼던 과정이었다.

논쟁은 상대를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진실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배웠다.

오늘 우리의 논쟁은 너무 쉽게 승패를 가른다. 질문보다 낙인이 앞서고, 경청보다 확신이 앞선다.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침묵시키려 하고, 다른 의견은 틀린 의견으로 단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은 한 사람의 독점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진지하게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부족함도, 상대의 타당함도 함께 발견하게 된다.

에라스무스와 원효는 서로 만난 적도 없고, 같은 신앙과 철학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한 사람은 르네상스 유럽의 기독교 인문주의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통일신라의 불교사상가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한 가지에서 깊이 만난다. 상대를 이겨 침묵시키기보다 대화를 통해 더 넓은 진실을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490년이 지난 오늘, 나는 다시 에라스무스를 떠올린다. 그리고 문득 원효도 함께 떠오른다. 시대도 다르고 언어도 달랐지만, 두 사람은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당신은 논쟁에서 이기려 하는가, 아니면 진실에 가까워지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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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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