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복음 15장에 잃은 양 비유, 잃은 드라크마 비유, 돌아온 탕자 비유 등 세 가지 비유가 있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을 비방하며 수군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2 ,3절)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데 아들이 유산 상속을 미리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재산 상속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패륜이나 다름없다.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고향에 돌아오면, 마을 사람들이 그의 집 앞에 깨진 항아리를 던지면서 그를 마을 공동체에서 영구 추방하는 케짜(Qetsachah) 의식을 치르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는 마을사람들이 케짜의식을 벌이기 전에 먼저 뛰어나가 아들을 맞이한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춘 뒤 잔치를 벌이고 가락지를 끼워준다.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준 것이다.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듯이 받아 챙겨 집을 나간 동생은 오랜 방황과 참회 끝에 마침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재산을 미리 분배받아 탕진한 불효자이지만, 그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의 품에 다시 안겼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아버지가 죽으면 맏아들이 다른 아들의 두 배에 해당하는 재산을 상속받게 되어 있었다(신명기 21:15-17). 아들에게만 유산상속권이 있고, 아들이 없는 경우에만 딸이 상속받을 수 있었다.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많은 유산상속권을 가진 형은 아버지처럼 동생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떠나 있었고,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진정한 가정의 평화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娼妓와 함께 날려버린 동생을 미워했고, 집에 돌아온 동생을 반기는 아버지의 태도에 분노했다. 집밖으로 나간 동생은 그 몸이 아버지로부터 소외됐고, 집안에 남아있는 형은 그 마음이 아버지로부터 소외됐다.
동생이 없는 집안은 깨진 가정이다. 형의 효도가 동생의 존재를 대신할 수 없다. 아버지에게는 형처럼 충성스런 아들 하나보다는 못난 동생이라도 함께 있는 두 아들이 더 소중했다. 동생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집안은 이렇듯 안으로 깨어져 있었다. 이 깨어짐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집을 나간 동생이 돌아오는 것뿐이다.
그러나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가정의 깨어짐은 회복되지 못했다. 예수님은 맏아들이 노하여 ‘집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았다’고 말씀한다(15:8). 이번에는 맏아들이 집을 나간 것이다. 맏아들이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는지, 아니면 집 밖에 마냥 버티고 서있었는지, 그 다음의 상황에 대해서는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소외를 깨달은 동생은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지만, 형은 아버지의 마음과 동떨어진 내면의 소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한마음이 될 수 없었다. 정작 아버지와 하나되기 위해 마음을 돌이켜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지만, 그는 스스로의 ‘떠나 있음’을 깨닫지 못했고 ‘회복의 필요’를 자각하지 못했으므로 결국 평화의 가정으로 다시 돌아올 줄도 몰랐다.
집을 떠난 적이 없는 형은 집으로 돌아올 일도 없었고, 돌아올 수도 없었다. 동생은 ‘돌아온 탕자’였고, 형은 ‘돌아오지 않는 탕자’였다. 아니, ‘돌아올 수 없는 탕자’였다.
이 비유에서 맏아들은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 세리와 죄인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죄인들’이고,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의로운 자’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탕자, 이것이 오늘날 크리스천의 모습 아닐까? 몸은 집(house) 안에 있지만 마음은 가정(home)을 떠나 있다. 가정 없는 집(homeless house)들만 즐비한 셈이다.
제도종교 안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소속감이 하나님에게서 실질적으로 떠나 있는 자신의 삶의 자리(Sitz-im-Leben)를 깨닫지 못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헌금을 바치고 신앙고백을 암송하며 습관처럼 기도와 설교를 반복하는 종교행위들이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는 길은 아니다. ‘주여 주여 부르짖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실행하는 자’들이 바른 신앙인이라고 선언한 것은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다(마태복음 7:21).
그리스도의 성품이 내 인격에 부딪쳐 등줄기 서늘한 섬광을 일으키는 영혼의 충격 없이는, 수많은 헌금과 우렁찬 신앙의 고백도 모두 헛된 제물일 뿐이다. 거짓말이 일상화되고 미움과 질시의 불길이 인격 속에 고착되어 있는 한, 신전의 마당만 밟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 선지자 이사야의 경고다(이사야 1:12,13). 오늘의 우리 교회들 안에 얼마나 많은 갈등, 미움, 분노, 파벌, 싸움이 있는가?
사탄은 교회의 구석자리에 숨어있지 않다. 악령은 ‘빛의 천사’처럼 당당하게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린도후서 11:14). 그 빛의 천사는 교회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적이다. 집에 머물러 있되 아버지의 마음을 떠나버린 맏아들처럼, 교회와 제도종교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되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버린 신자들이라면, 그들은 언제까지나 돌아올 줄 모르는 탕자들일 수밖에 없다.
회복의 길은 오직 하나다. 스스로가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떠나있다는 깊은 자각뿐이다. 회개와 공의의 요구를 거슬러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는 처절한 깨달음뿐이다. 이 자각과 깨달음이 없는 한, 비록 고백과 예배의 현장 속에 있더라도, 저 무수한 축원祝願들과 설교의 홍수 속에 흠뻑 젖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 탕자일 따름이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한국교회는 신앙의 진실보다는 그것을 싸안고 있는 종교적인 틀과 형식, 그리고 여러 율법적 규율들에 더 집착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배와 성례전聖禮典의 거룩한 종교의식들, 헌금과 전도 등 종교적으로 정형화된 특정행위들, 고백문의 암송과 습관적인 기도들, 구원의 약속과 축복에 크게 기울어져 있는 설교들, 그리고 저 무수한 축원祝願과 강복降福들…
또 거대한 교단敎團과 크나큰 교회당들, 교회 직제職制의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그러나 싸늘한 관료적 조직들, 예산과 신도관리의 경영학적인 시스템들, 호화로운 호텔 안에서 밴드의 연주와 고급요리로 치러지는 ‘누군가를 위한 국가조찬기도회’들…
그와 같은 종교적인 틀과 제도 또는 행위들이 만약 신앙의 진실과 핵심내용을 가리고 압도한다면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문화의 사회적 존재양식의 하나인 여러 종교현상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물론 신앙의 영역에서 모든 종교적 형식과 교리적 규범을 축출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입장이 언제나 올바른 것은 아니다. 내용과 실질은 형식이나 규범으로부터 독립해 있지 않다. 형식으로부터 분리된 실질은 그 자체로서의 인식이 불가능하다. 형식과 규범은 내용과 실질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필수조건이다.
성서는 성찬과 세례의식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시 또는 계승되었고, 교회의 조직과 예배의식 등이 거룩한 초대교회의 전승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히 보여준다. 신앙은 그 내용과 함께 그것을 담을 정결한 그릇 또한 필요하다. 인간은 모두 선생과 인도자 없이는 홀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유한자有限者이기 때문이다(사도행전 8:31).
교회공동체와 신령한 예배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고한 두 기둥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다가가서 실존적으로 찾아내야(to find out) 하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 실존을 향해 스스로 찾아와 ‘자기 백성들 안에서’ 그 자녀를 만나시는(to meet) 인격적 주체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의식은 ‘하나님 나라’ 개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마태복음 22:37∼40). 이웃과의 관계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설정되고 유지되는 데 있어서는 신앙의 공동체를 위한 적절한 틀과 형식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러한 종교적 틀과 규범들이 신앙의 진실을 상실하고 복음을 다시금 의식적이고 율법적인 바리새적 신앙형태로 꾸준히 변질시켜 감으로써, 중세의 가톨릭처럼 형해화形骸化되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디모데후서 3:5) 외형적 거대종교巨大宗敎를 지향한다는 데 있다.
기독교와 교회의 역사는 신앙의 정체성正體性을 보존하는 과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려주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어져 왔다. 그 과제는 정당한 틀과 형식을 제대로, 바르게 세우는 일 없이는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노력을 집어던진 자유방임적 입장으로부터 많은 오류와 이단들이 발생되어 왔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한국교회가 이러한 종교적 틀과 형식에 안주하게 된 데에는 오히려 ‘복음적이라고 주장되는’ 어떤 이유가 그 밑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의 구원 앞에서 아무런 공로도 내세울 것 없는 신앙인들이 할 수 있는 반응이란, 오직 열정적인 예배와 감각적 체험의 간증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 뿐이라고 치부되어 온 면이 적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마땅히 지녀야 할 반응(response)은 곧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책임(responsibility)을 감당하는 일이다(빌립보서 2:12). 그 책임이 성화聖化(sanctification)의 길이다. 성화는 말씀에 의해 날카로운 영혼의 도전을 받고 십자가를 진 긴장된 생명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며, 모든 삶의 자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에 순종하는 삶의 길을 뜻한다.
성화는 푯대를 잡으려고 부단히 달음박질하는 일이요, 가나안을 향해 거친 광야를 건너는 힘겨운 일이다. 이 일을 한국교회는 얼마나 자각하고 있으며 이것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신앙은 교회의 집회와 예배의식 그리고 신비현상 같은 가시적可視的이거나 체험적인 종교의 틀로써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잣대로 남을 혹독하게 심판하는 바리새인들이 교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엄숙한 종교의식과 번잡한 규례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있다면, 그들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리 떠나있는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탕자들일 뿐이다.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기 전에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썼다(고린도전서 3:16) 예루살렘 성전이 우뚝 서있는데도, 그 성전이 아니라 신앙인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놀라운 통찰이다. 성전파괴 후에 쓰인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과 어린 양이 친히 성전이 되신다”(요한계시록 21:22)는 기록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로마서 14:5) 사도바울은 안식일과 평일을 구별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제물이나 헌금 등 죽은 제물이 아니라 신앙인 자신의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했다(로마서 12:1) 주일의 교회예배만이 아니라, 평일의 일상적 삶이 곧 예배요 제물이라는 가르침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에 유대교는 회당이 종교의 중심이 되었다. ‘제사’가 아니라 ‘교육’이 종교의 핵심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이전에 이미 성전의 제사나 회당의 교육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곧 신앙임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성전이 아니라 산에서, 광야에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시장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
십자가는 성전 안에 세워지지 않았다. 광야로 나아가는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히브리서 4:14)은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적이 없다. 성전의 가장 외곽지대인 솔로몬 회랑을 거니셨을 뿐이다(요한복음 10:23). 예수님은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내어쫓으실 때, 단 한 번 물리력을 행사했다(마태복음 21:12). 세상과 죄인을 정화淨化하는 일에는 물리력이 아나라 오직 사랑과 용서를 베푸신 예수님이 오직 단 한 번, 성전 정화, 종교 정화, 물신物神의 우상숭배를 물리칠 때는 폭력을 쓰신 것이다.
’예언자전승’의 선두주자인 이사야는 사회정의와 윤리적 삶의 실천을 외쳤다. 성전제사에는 온갖 정성을 바치면서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축복과 형통만을 기원하는 ‘제사장전승’에 대하여 이사야는 그 비윤리적, 비신앙적 삶을 엄히 꾸짖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수송아지나 어린 양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과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이사야 1:13) 제사장전승을 향해 던지는 예언자전승의 무서운 질책이다.
이사야는 삶과 동떨어진 성전예배, 윤리와 정의를 외면한 제도종교는 진정한 신앙의 자리가 아니라고 질책한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행악을 그치고 선행과 정의를 배우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이사야 1:15~17)
예배와 종교의식과 교회 봉사에 매달리는 제사장전승과 거기에 익숙해진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사야는 예언자전승의 매서운 경고를 던진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악한 행실을 버리라.”(이사야 1:16) ‘내 목전에서’ 즉 내 ‘눈앞에서’는 성전 밖의 비종교인이 아니라 성전 안의 종교인들을 가리킨다. 찰스 스퍼전 영국 침례교 목사는 “양치기들이 양에게 먹이를 주는 대신에 염소를 즐겁게 해주는 광대들로 교회에 등장할 때가 온다”고 탄식했다.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마태복음 25:31~46)를 패러디한 것이다.
수도원에서 엄격한 금욕생활에 몰두했지만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었던 가톨릭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로마를 순례하던 중에 ‘거룩한 계단 성당’에 있는 빌라도의 스물여덟 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며 무릎으로 기어올랐다. 어떤 전승에 의하면, 루터가 계단을 오르던 도중 로마서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천둥처럼 울렸다고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 구약 하박국서 2:4을 인용한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오르셨다고 전해지는 빌라도의 계단은 16세기에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거룩한 계단 성당’으로 옮겨졌다.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빌라도의 계단에서 루터는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던가 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로마서 1:17)는 사도 바울의 선포가 무슨 뜻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킹제임스 성경( KJV)과 우리 개역개정 성경은 ‘믿음에서 믿음으로’라고 번역했고, 새 번역 영어성경(NIV)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라고 음역意譯했다. 공동번역 성경은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간다’고 풀어 썼다.
한편 신정통주의 신학의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나의 신실함으로’라고 새긴다. 믿음은 히브리어 에무나(אמֶונה)다. ‘아멘’의 원형인 ‘아만’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에무나는 성서에서 대부분 ‘신실함'(미쁘심)으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를 통해 우리가 신실한 삶에 이른다’는 칼 바르트의 해석은 우리 믿음의 근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밝히는 또 하나의 신앙고백이다. 루터 신학의 요절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을 ‘의인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신(미쁘신) 은혜와 그에 응답하는 신실한(믿음의) 삶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입체적인 뜻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총은 입술의 고백을 넘어 신실한 믿음의 삶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신앙고백을 남겼다. “그리스도가 진리 밖에 있는 것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진리 밖에 있겠다.” 나는 여기의 ‘진리’를 성전종교로, ‘진리 밖’을 일상의 삶으로 이해한다.
불의한 동생을 미워하는 의로운 형처럼 우리 또한 흠 있는 이웃을 배척하고 허물 많은 형제를 용납할 줄 모른다면, 몸은 비록 하나님의 집에 있어도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 탕자와 다를 바 없다. 돌아오지 않는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길은 오직 하나, 내 의로움과 도덕적 자만심이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돌이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뿐이다.
나는 두렵다. 주일마다 교회의 예배의식에 참여하면서도 일상의 삶에서는 내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는 참 신앙에는 게으르지 않았는지 두렵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종교인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채, 신앙의 자리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지, 매우 두렵고 떨린다.
교회당 안의 주일예배에서 위로와 평안을 얻고 찬송하며 감사하는가? 교회 밖 일상의 삶에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빌립보서 2:12).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지만, 내 삶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우리의 신앙적 책임이다.
내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마가복음 8:34). 우리는 돌아온 탕자인가, 돌아오지 않는 탕자인가? 성전 안에 있는 종교인인가, 성전 밖 일상 속의 신실한 신앙인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