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칼럼

[이우근 칼럼] 선동과 감시의 시대…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원형 감옥, 판옵티콘(Panopticon)의 도면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의 아테네 정치는 클레온과 알키비아데스 등 선동가들의 독무대였다. 그들은 민중의 허영과 증오심을 부추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국 스파르타에 패배하고 아테네는 몰락의 길로 치달렸다.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 말기.
클로디우스 등의 선동정치인들은 정적을 숙청하고 민중에게 선심 공약을 남발하면서 정치생명을 연장했다. 저들의 감정적 선동과 정치적 양극화는 마침내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독재와 제정(帝政)으로 넘어가는 발판이 되었다.

​20세기 전반기의 이탈리아와 독일.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인간의 감정을 들쑤시는 자극적 호소와 간단명료한 메시지로 대중을 선동하면서 파시즘과 나치즘의 포퓰리즘 독재체제를 이끌었다. 야스퍼스, 아렌트, 본회퍼 등 지성인들이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감성에 휩쓸린 일반 대중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1세기의 오늘날.
포퓰리즘의 선동정치는 여전히 거친 숨을 뿜어내며 민주주의를 희롱하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편 가르기, 고소득층의 것을 빼앗아 저소득층의 주머니를 부풀려주는 선심 정책 등 다양한 전술로 대중의 지지를 낚아챈다.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된다”는 플라톤의 경고는 고대 그리스의 허공을 떠돌던 메아리만이 아니다. 오늘날의 민주정치를 향한 깊은 우려이기도 한다. 선동정치는 민주정치의 현장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일쑤다. 선동가는 분노와 공포의 감정을 자극해 대중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낸다.

18세기 말 벤담이 제안한 원형 감옥. 중앙의 감시탑에서 둘레의 모든 수감실을 관찰할 수 있지만, 수감자는 자신이 실제로 감시받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보이지 않는 감시’는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게 만드는 심리적 효과가 있다. <AI 생성 이미지>

AI‧CCTV‧스마트폰 등 오늘날의 정교한 소셜미디어는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인용한 제러미 벤담의 판옵티콘(Panopticon)처럼 대중을 감시, 통제하는 전제권력의 막강한 도구가 되었다.

​진실이나 이성보다 감정과 집단 심리에 호소하는 선동은 민주주의의 숲에 돋아나는 독버섯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정치는 지성과는 반대방향으로 치달린다. 대중에게 온당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고, 비판적 사고를 촉구하며, 선명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학계‧언론계‧종교계‧법조계 곧 이성적 사고를 지닌 지성계의 몫이다.

그렇지만 정치선동가들은 지성계를 개혁의 대상인 기득권 카르텔로 몰아세우며 무력화하려 든다. 민주주의 제도를 이용해 권력을 잡은 뒤 민주주의를 내부에서부터 파괴하는 행태다.

​지금 한국의 지성계가 과연 자신의 지성적 역할에 충실한가. 긍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들이 진영 갈등과 정치 선동에 앞장서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정치 진영의 한쪽에 서서 상대를 수구(守舊) 또는 적폐로 낙인찍거나 반국가세력, 반민주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신문‧ 방송‧ 유튜브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증오와 적개심, 분노와 공포를 증폭시키는 정치 선동의 앞잡이 노릇을 일상사처럼 벌이고 있다.

경제위기나 전쟁의 위험이 닥치면 국민은 번잡한 법적 절차보다 신속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강력한 지도자를 기다린다. 독일 법학자 칼 슈미트는 “위기 시대의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한다”고 단언했다. 한나 아렌트는 “고립된 개인들은 대중사회 속에서 전체주의를 지지하게 되고, 대중이 사실과 거짓의 구분을 포기할 때 전체주의가 성장한다”고 진단했다. 토크빌이 지적한 ‘부드러운 전제정치'(Soft despotism)의 출현이다.

​선동정치는 단기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킨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주권자인 국민은 선동정치의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가해자인 선동가의 공범이 되기도 한다. 선동가가 제공하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며,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다른 주장에는 귀를 막고, 투표권을 책임 있게 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 선동에 월계관을 씌워주는 셈이다.

계몽사상의 선구자 임마누엘 칸트는 “용감하게 알려고 하라’”Sapere Aude)는 명언을 남겼다. 진실에 다가가려고 애쓰는 용기는 정치 선동을 막아내는 강력한 해독제다. 냉철한 이성의 주권자로 살 것인가, 감성적 선동에 휩쓸리는 박수부대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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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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