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사람

스무살에 전쟁을 겪은 어머니는 탱크보다 꽃을 먼저 보셨다

나는 휠체어를 밀며 말했다. “어머니, 탱크 앞에서 사진 찍으셔요.” 그러나 어머니의 눈길은 탱크가 아니라 작은 화분에 머물렀다. “어쩌면 이렇게 예쁘냐.” <사진 황건>

오늘은 어머니를 모시고 인하대병원 외래에 다녀왔다.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지 꼭 1년. 만 아흔다섯의 어머니는 휠체어를 타고도 여전히 세상 구경을 좋아하신다.

진료를 마치고 문득 생각난 곳이 있었다. 의사수필가협회 단체방에서 한 임원께서 추천해 주신 인천 학생 6·25 참전관이었다. “안 가보셨으면 한번 들러 보세요.” 우리 집에서는 꽤 먼 곳이다. 하지만 인천에 온 김에 들르기로 했다.

놀랍게도 그곳은 내가 인천에서 근무하던 시절 수 없이 지나던 길, 지하철 출구 바로 앞이었다. 그렇게 많이 다녔으면서도 이런 전시관이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알지 못했다.

<사진 황건>

길가에 마침 빈자리가 있어 차를 세웠다. 전시관은 무인이며,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하니 맞은편 치과에서 전화를 받았다. “몇 분이세요?” “둘입니다.”

잠시 뒤 치과 근무복을 입은 치과위생사 한 분이 길을 건너와 문을 열어 주었다. 관람객만 두고 돌아갈 수 없었던지 우리와 함께 전시실을 돌며 설명도 해 주었다.

이곳은 원래 치과였다. 병원을 길 건너로 옮긴 뒤 치과 유니트만 철거하고, 그 자리를 소년병과 학도병을 기리는 전시관으로 꾸몄다고 했다. 원장의 아버지가 학도병이었다.

인천에서 약 2천 명의 소년병이 참전했고, 그중 약 2백 명이 전사했다.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아버지는 평생 자료를 모았고, 아들은 그 뜻을 이어 전시관을 만들었다.

전시는 다소 소박했다. 그러나 내 발걸음을 오래 붙잡은 것은 낡은 휴대용 녹음기와 그 옆에 쌓인 수백 개의 카세트테이프였다. 참전용사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며 남긴 육성이었다. 총과 탱크도 역사를 증언하지만, 사람의 목소리만큼 생생한 증언은 없을 것이다.

<사진 황건>

그런데 오늘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장면은 따로 있었다. 전시장 한쪽에는 컴퓨터 모니터만 한 탱크 모형이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작은 화분 하나가 있었다.

나는 탱크를 보여 드리려 했지만, 어머니는 꽃을 보셨다. 전쟁을 살아낸 사람은, 어쩌면 무기보다 생명을 먼저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황건>

나는 휠체어를 밀며 말했다. “어머니, 탱크 앞에서 사진 찍으셔요.” 그러나 어머니의 눈길은 탱크가 아니라 작은 화분에 머물렀다. “어쩌면 이렇게 예쁘냐.”

순간 박남수의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가 떠올랐다. “방공호 위에/ 어쩌다 핀/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인젠 지구가 깨어져 없어진대도/ 할머니는 역시 살아 계시는 동안은/ 그 작은 꽃씨를 받으시리라.”

어머니는 1930년에 태어나 이화대학에 다니다가 한국전쟁을 맞으셨다. 1·4 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다. 전쟁은 어머니에게 역사책 속 사건이 아니라, 스무 살 청춘의 기억이었다.

나는 탱크를 보여 드리려 했지만, 어머니는 꽃을 보셨다. 전쟁을 살아낸 사람은, 어쩌면 무기보다 생명을 먼저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했다. 치과였던 공간은 기억을 지키는 전시관이 되었고, 그 안에는 참전용사들의 목소리가 카세트테이프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아흔다섯 살 어머니는 탱크보다 작은 화분을 먼저 바라보셨다.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지 꼭 1년. 오늘도 어머니는 꽃을 보셨다. 부디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어머니와 함께 꽃을 바라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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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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