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 나는 한 시인의 어록을 떠올린다. 조오현 스님의 시다.
건져도 건져내어도
그물은 비어 있고
무수한 중생들이
빠져 죽은 장경(藏經)의 바다
돛 내린 그 뱃머리에
졸고 있는 사공아
나를 시인으로 추천해 주셨던 그분의 이 시는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고려대장경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것이 단지 지식의 집적이 아니라 방향을 잃으면 사람을 삼키는 바다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요즘 나는 진료실에서 또 다른 바다를 마주한다. 검색의 바다다. 환자들은 더 이상 무지하지 않다. 증상을 검색하고, 영상 자료를 보고, 때로는 논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제가 찾아보니까요…”로 시작되는 말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들의 노력은 진지하고, 그 불안 또한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몸의 이상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지식을 통해 안정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정보는 종종 더 깊은 불안을 낳는다. 인터넷의 지식은 조각난 채 떠다닌다. 맥락이 제거된 채, 개인의 상황과 분리된 채, 확률과 예외가 뒤섞인 채 전달된다. 의학은 본래 ‘정답’이 아니라 ‘가능성’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검색의 세계는 그것을 단정적인 언어로 바꾸어버린다. 그 결과 환자는 더 많이 알게 되지만, 더 잘 이해하게 되지는 않는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그 시를 떠올린다. “건져도 건져내어도, 그물은 비어 있고.”
아무리 많은 정보를 끌어올려도 정작 손에 남는 것은 없을 수 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더 깊이 빠져들 뿐이다. 장경의 바다에서 그랬듯, 검색의 바다에서도 우리는 종종 같은 방식으로 길을 잃는다.
불교의 오래된 통찰은 이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금강경은 “법마저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진리를 가리키는 가르침조차 집착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길이 아니라 장애가 된다.
진료실에서 의사의 역할도 다르지 않다. 모든 정보를 나열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정보들 속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 환자의 몸이라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를 함께 판단하는 사람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이 다시 떠오른다. “돛 내린 그 뱃머리에 졸고 있는 사공아.” 혹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 순간, 이미 방향을 잃은 채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부처님오신날,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이 많은 지식 속에서 나는 과연 길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