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오월에 내곁을 떠난 이들…노겸 김지하·무위당 장일순·우졸당 장태원

김지하 시인, 장일순 선생, 필자 이병철 시인(왼쪽부터)

​꽃이 시시때때로 피고 지듯 사람의 태어남과 돌아감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터이다. 날마다, 달마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돌아간다. 해마다 그 태어난 날을 생일이라 기념하며 축하하고, 돌아간 날을 기일이라 추모한다. 이번 생에서 나와 인연한 오월의 기일들을 생각한다.

​5월 8일은 어버이날이지만, 내가 형님으로, 사형(師兄)으로 모셨던 노겸 김영일 시인(김지하)의 4주기 기일이기도 하다. 내가 김 시인을 형으로 모시게 된 것에는 여러 인연이 겹쳐 있다.

김 시인은 내 생애 첫 형님으로 모셨던 인농 형님의 절친이었고, 김 시인이 오직 한 분의 선배로 인정했던 정농 어른이 바로 내가 또 다른 장인어른으로 모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김 시인과는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옥살이를 했던 사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스승 무위당(장일순)을 함께 모셨던 사이이기도 하다.

​그런 인연으로 내가 처음 출간했던 책에 김지하 시인은 과분한 표사를 써주었고, 새천년 메시지로 출간했던 “살아남기, 근원으로 돌아가기”에는 ‘귀농은 율려의 각비(覺非) 운동-이병철 형의 귀농론에 부쳐’라는 장문의 발문을 써주었다.

그 첫 문장은 “우선 내 이름이 김지하에서 김영일로 바뀌었음을 알린다”로 시작한다. 이제부터 자신을 음습한 ‘지하’라는 이름 대신 본래의 이름인 ‘햇살 아래 밝은 한 송이 꽃’ 김영일(金英一)로, 그리고 호를 ‘노력하는 겸손, 활동하는 무(無)’를 뜻하는 ‘노겸(勞謙)’으로 불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김지하에서 ‘노겸 김영일’로 자신의 이름을 되찾으면서, 이를 내 책의 발문을 통해 처음 세상에 알린 것이다.

​김 시인이 피신해 있던 시절 남녘을 떠돌며 쓴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 편지’의 서문에는, 직접 연락할 수 없는 형편이니 연락할 일이 있으면 대신 나에게 하라며 내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적어 놓았다. 정작 내 책에도 없던 전화번호가 그의 책 서문에는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인연들로 우리는 남해안의 이른 봄길을 함께 걷기도 하고, 여러 말씀을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전에 나는 김 시인의 이야기와 그가 그리고자 했던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김 시인 1주기를 맞아 그를 따르던 이들이 마련한 2박 3일의 추모 심포지엄에서 나는 토론자로 참가하여, 나에게 비친 김 시인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노겸 김영일 시인, 그는 내가 여태껏 만나본 이들 가운데 가장 감성이 뛰어난 시인이었고, 반독재 민주화 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투사였으며, 가장 예민하고 깊은 통찰력을 지닌 사상가이자 몸으로 살아간 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시대의 천재였고 신지핀 자이자 광인이었으며, 동시에 세기의 큰 무당이자 예지자였습니다. 그보다 먼저 그는 아픈 사람, 온몸으로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온 존재로 가족사를, 민족사의 애환을, 세상을 품고 앓았습니다. 그렇게 시대를, 역사를 혼신으로 앓았습니다. 그 고통의 예민한 촉수로 그는 생명을 신음하고 노래했습니다. 그는 애초부터 일반인의 잣대로는 가늠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나는 토론 말미에 이제부터라도 김 시인이 생전에 그토록 원했던 본래의 이름을 찾아주자고 제안하였다. ‘김지하’라는 이름이 이미 세상에 굳어져 어쩔 수 없다면, 그 앞에 ‘노겸’이라는 호라도 함께 불러주자고. 그것이 그를 추모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약속일 것이라 말했고, 모두가 이에 공감하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를 ‘노겸 형’이라 부른다.

​내가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이것 또한 하나의 역사적 기록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 나름의 회고록이라 해도 좋겠다.

​추모 심포지엄을 마치고 원주에 있는 김 시인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2주기 때도 묘소를 찾았으나 3주기인 지난해와 올해는 가지 않았다. 묘소를 찾는 행위가 이제는 내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스승 무위당과 함께 생명운동의 의미를 일깨워준 노겸 형님의 생각과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 지금의 나에게는 더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장일순 선생 대형 사진 옆에 서있는 필자

​5월 22일은 내가 이번 생에서 ‘스승’이라 고백했던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의 기일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때가 1994년이니 올해로 32주기가 된다. 선생이 돌아가신 날, 부음을 듣고 달려간 치악산 자락 봉산동 누옥에서 전등 불빛에 비친 뜨락의 마로니에 나뭇잎이 어찌나 푸르게 빛나던지, 그것은 스승을 여읜 슬픔보다 더 큰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부탁받은 추모시의 제목을 ‘스승은 떠나고 나뭇잎은 푸르다’라고 지었다.

​치악산 자락의 한 그루 큰 나무 같았던 분. 그 너른 품으로 찾아오는 모든 생명을 따뜻하게 품어 안으셨다. 가림이 없었다. 나는 큰 사람의 품을 그렇게 보았다.

​2004년 무위당 선생의 10주기 기일에는 ‘나의 스승은 백수였다’라는 시를 지어 올렸다. 생전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셨기에 소유당하는 수모를 겪지 않으셨고, 천천히 걸으며 길섶의 꽃과 눈 맞출 수 있으셨노라고 썼다. 그리고 나 또한 스승을 따라 백수라는 고백을 했다.

​지지난해 스승의 30주기를 기점으로 나는 더 이상 선생의 묘소에서 열리는 추모 행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기리는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한다는 내 생각을 전한 것이다.

​선생이 이 땅에 살아가신 세월은 67년. 지금 나는 생전의 선생보다 10년 넘게 더 오래 살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헤매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시 누구를 찾아가 길을 물어야 할지 막막하다. 사형이라 부르는 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그분들 또한 그저 말없이 웃으실 뿐이다.

​5월 19일은 혈육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우졸당(又拙堂, 장태원) 형의 3주기이다. 형을 처음 만난 1978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45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하였다. 초창기 농민운동부터 우리농 운동, 생명평화결사, 지리산 연찬까지, 운동이라는 이름만이 아니라 삶의 애환 또한 함께 나누었다.

​내가 함께하자고 했을 때 형은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진실한 형님이었고 대인이었다. 형의 장례 때 호상(護喪)을 맡고, 1주기 표석의 묘갈명(墓碣銘)에 “선생은 우리 곁의 큰 사람이었다”라고 쓴 것도 이런 까닭이다.

노자와 장자를 강의하던 형의 책 제목을 <노자와 촌로>라고 정한 것 또한 그의 성품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형을 직접 만질 수 있는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금 내 곁에는 형이 서명해 준 책과 직접 새겨준 서각 한 점, 그리고 옻칠하여 다듬은 감태나무 지팡이 하나가 남아 있다. 형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유물들이다.

​오월, 신록으로 눈부신 이 달에 내 곁에 왔다가 먼저 떠난 고마운 인연들을 떠올리며 오고 감을 새삼 생각한다. 저 싱그러운 초록도 때가 되면 낙엽 되어 떨어지듯, 인연 또한 그러함을 깨닫는다.

​올해 오월에 먼저 가신 소중한 인연들의 명복을 빈다. 저 세상의 오월 또한 이처럼 눈부시기를. 언젠가 돌아갈 그때까지 나 또한 주어진 나날을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마음 모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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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시인, 생명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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