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뒷마당’에 삽 들이댄 중국


니카라과운하 건설

중국 ‘꽃놀이패’ 니카라과 ‘대박’ 미국 ‘눈엣가시’

중국이 니카라과운하를 맡아 건설하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올 8월 개통 100주년을 맞는 파나마운하에 맞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제2의 대운하를 판다는 거창한 프로젝트다. 그런데 중남미가 어떤 곳인가. 미국은 몬로 독트린 이후 파나마운하는 물론 중남미 전역을 자기네 ‘뒷마당(backyard)’으로 치부해 왔다. 중국이 미국 세력권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보란 듯 땅을 파헤치는 게 달가울 리 없다. 아직은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니카라과운하가 정말 건설돼 파나마운하의 경쟁상대가 되고, 그것도 중국 통제 아래 들어갈 것이 확실하다면 미국이 팔짱 낀 채 구경만하리라 보기 어렵다. 미국이 과연 어떤 대응책을 들고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니카라과운하 프로젝트는 2012년 9월26일 니카라과 정부 산하 대양간대운하위원회와 케이먼 아일랜드에서 설립된 중국계 민간법인 홍콩니카라과운하개발투자회사(HKND)그룹이 재원조달·건설 양해각서를 체결함으로써 시작됐다. 2013년 6월13일 니카라과 의회는 HKND에 운하 건설관리, 부대사업 운영권을 50년간 부여하고 다시 50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내용의 법안을 의결했다. 6월15일에는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과 왕징(王靖) HKND그룹 회장이 니카라과운하 건설운영 합의서에 서명했다.

계약에 서명한 두 사람부터 살펴보자. 오르테가 대통령은 1970년대 말 니카라과 산디니스타(FSLN) 혁명군 지도자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독재정권에 항거해 싸웠던 바로 그 오르테가다. 그는 1979~85년 국가재건위원회(Junta) 간사로서 니카라과를 이끌었고 1985~90년 대통령을 지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자처했던 오르테가 정권이 1990년 퇴진한 것은 선거를 통한 공산정권 교체의 첫 사례였다. 오르테가는 희귀하게도 공산 혁명으로 집권했다가 선거에 의해 쫓겨나고 다시 선거로 복귀한 최초의 정치인이 됐다.

1945년생인 오르테가는 1996년, 2001년 대통령선거에 연속 출마했으나 떨어졌고, 3수 끝에 2006년 대선에서 당선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공산주의자에서 민주사회주의자로 탈바꿈하면서 FSLN 온건화를 주도했고 낙태 전면금지 등 친가톨릭 정책노선으로 선회하기도 했다. 2006년에 이어 2011년 재선됐고, 지난 1월 FSLN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의회가 헌법의 대통령 연임제한 조항을 폐기하는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2016년 대선에 또 출마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편 왕징은 1972년 베이징 출생의 중국기업가로 신웨이(信威)통신산업집단 회장이다. 신웨이그룹은 중국 3G 모바일 서비스 핵심기술을 보유한 기업으로 시가총액 11억 달러로 평가되는데, 왕 회장이 37%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신웨이는 2013년 니카라과에 3억 달러 규모의 휴대전화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왕징은 베이징에서 한의학을 공부했고, 캄보디아 등 동남아에서 금광·철광·보석광산을 개발하면서 자본을 축적했다. 현재 신웨이를 비롯한 20여 개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론 무명에 가까운 기업인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신웨이 홈페이지에는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 등 중국 지도부가 회사를 방문했다고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왕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보통사람이라면서 “중국 정부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니카라과운하는 건설기간 6년, 건설비용 400억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면서 “이미 글로벌 투자가들을 성공적으로 확보했다”고 말했다. 건설비 400억 달러는 니카라과 국내총생산(2011년 기준)의 4배에 이르는 액수다. 니카라과운하가 완공되면 현재 52억5000만 달러의 사업비를 들여 확장공사 중인 파나마운하와 물동량을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된다. 니카라과 이웃국가인 온두라스는 이와 별도로 중국계 자본으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계획을 추진 중이다.

영국 일간지 는 1월12일자에서 왕징 회장과 오르테가 대통령이 각각 예정대로 2014년 12월 운하를 착공해 2019년까지 완공할 계획임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니카라과운하는 총 286㎞ 길이에 깊이 27.6m, 너비 520m로 40만t급 선박이 통과할 수 있도록 건설될 예정이다. 공항 2곳과 철도, 송유관, 항구시설이 함께 건설된다. 참고로 파나마운하는 길이 77.1㎞에 갑문 수심 12.5m, 너비 33.5m이다. 2015년 확장공사가 끝나면 현재 파나맥스(Panamax) 5만2500t급, 컨테이너선 5000TEU급에서 뉴파나맥스(New Panamax) 12만t급, 컨테이너선 1만2000TEU급이 항행할 수 있게 된다.

니카라과에 운하를 파자는 아이디어는 일찍이 19세기 초부터 나왔다. 그 전통적 노선은 카리브해 연안 산후안 데 니카라과에서 산후안 강을 따라 니카라과 호 기슭 산 카를로스를 지난 뒤 드넓은 니카라과 호를 거쳐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경로다. 산후안 강 자연수로와 니카라과 호를 최대한 활용할 뿐 아니라 환경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이른바 ‘에코 루트’다. ‘골드러시’ 당시 동부에서 캘리포니아로 몰린 사람들이 이용한 길이 바로 이곳이다.

미국 대륙횡단철도와 파나마운하가 완공되기 전 태평양 연안은 유럽인들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닿기 힘든 오지였다. 미국이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이겨 캘리포니아를 편입한 것이 1847년. 이듬해 1월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강가에서 금이 발견됐고 1849년부터 골드러시가 벌어졌다. 골드러시로 외부에서 몰려든 채금꾼(forty-niners)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 대부분은 1851년 코널리어스 밴더빌트가 잽싸게 개척한 니카라과 경유 뉴욕-샌프랜시스코 루트를 밟았다. 니카라과 루트는 뉴욕에서 증기선을 타고 뉴올리언즈를 거쳐 산후안 데 니카라과(그레이타운)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 산후안 강, 니카라과 호를 거친 뒤 역마차와 말, 당나귀로 태평양 연안 산후안 델 수르까지 가서 다시 증기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여정이다.

 

건설비 400억 달러, 니카라과 GDP 4배

여기서 생각해보자. 한몫 잡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는 사람들이 육로도 있는데 왜 굳이 비싼 뱃삯을 치르고 해로를 택했을까. 1849~54년 골드러시 당시 캘리포니아 트레일은 상당히 위험했다. 인디언, 백인 정착민들의 습격 가능성이 상존했다. 게다가 식량과 말먹이를 조달하기 어려웠고 콜레라 등 질병 위험, 알칼리성 물과 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험난한 육로에 비하면 철도가 발명되기 전 뱃길은 오늘날 고속도로와 다름없었다. 심지어 미 동부에서 남미 대륙의 남단 마젤란해협까지 내려갔다 다시 캘리포니아로 올라오는 우회로를 택하기도 했다. 그 긴 물길도 육로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HKND가 택한 코스는 산후안 강을 이용한 에코 루트가 아니라 카리브해 연안 블루필즈(Bluefields)-니카라과 호 연안 모리토(Morrito)-니카라과 호-태평양 연안 브리토(Brito) 노선이다. 산후안 강이 코스타리카와 경계를 이루는 구간이 길기 때문에 외교분쟁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기존 도시가 운하의 기종점과 중간점으로 선정될 경우 토지수용 보상액이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보상금액을 최소화하려면 가급적 인구밀도가 낮고 도시화가 안된 무인지대가 유리하다. 이밖에 기술·장비의 발전으로 직선 굴착공사가 쉬워졌고 비용이 절감된다는 고려도 작용했을 수 있다.

 

바다처럼 드넓은 니카라과 호수 통과

바스코 발보아가 1513년 파나마지협을 가로질러 유럽인으로서 처음 태평양을 바라본 이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무역로 개척은 스페인 개척자들에게 중요한 과제였다. 16~18세기 신대륙 식민지는 크게 뉴스페인(멕시코 및 카리브 제도)과 페루(남미) 총독령 등 둘로 나뉘었다. 남미에서 페루가 중요했던 것은 어퍼 페루(볼리비아) 포토시(Potosi) 광산에서 남미 생산 은의 대부분이 산출됐고, 리마가 그 송출 항구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리마에 남미 스페인령 전체를 관할하는 총독부가 설치됐다. 은은 리마에서 배에 실려 파나마로 옮겨진 다음 인디오들의 어깨에 지워져 파나마지협을 지난 뒤 파나마 카리브해쪽 항구 포르토 벨로에서 다시 배에 실려 스페인으로 운송됐다.

뉴스페인 총독부가 중미에 운하를 파겠다고 생각했을 당시 후보지는 파나마지협, 니카라과 호수를 이용한 루트, 멕시코 유카탄 반도 북쪽 테후안테펙지협 등 3개였다. 1830년대 새로 태어난 중미연방공화국은 니카라과 루트를 탐사하고 278㎞ 길이의 운하 계획안을 만들었다. 1849년 골드러시부터 1914년 파나마운하 완공까지 니카라과운하 건설방안은 주로 미국에 의해 되풀이 제기됐다. 그러나 파나마운하 개발권을 갖고 있던 프랑스가 자금 부족과 건설노동자들의 질병, 난공사 구간 등으로 고전하면서 4000만 달러에 건설권을 미국에 팔았다. 이로써 니카라과운하는 ‘물 건너간’ 프로젝트가 되고 말았다.

필자는 지난 2012년 중미지역을 여행하면서 니카라과 호 북쪽 연안 항구도시 그라나다에서 배를 타고 호수 중간에 있는 오메테페 섬(Isla de Ometepe)에 간 적이 있다. 여행안내서에는 3시간 걸린다고 돼있었지만 실제로는 5시간 넘게 걸렸다. 뿐만 아니라 내가 탄 배가 500t급 큰 배였음에도 니카라과 호수가 얼마나 넓고 파도가 거친지 롤링과 피칭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바다 같은 느낌을 주는 호수는 카스피해와 미국-캐나다 사이 오대호 정도 아닌가 싶은데, 이들 호수는 파도가 치긴 해도 풍랑이 일어 배가 심하게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러시아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31,500㎢)는 니카라과 호(8,001㎢)보다 4배나 넓은데도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니카라과 호는 북단 그라나다에서 남단 산 카를로스까지 배로 14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얼마나 큰 호수인지 알 수 있다.

니카라과운하는 단순히 해운만이 아니라 군사전략, 패권 향배와 직결되는 문제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태평양을 사실상 독점해온 상태에서 중국이 니카라과운하를 장악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미 해군력이 괌이나 하와이도 아닌, 중미지역으로까지 후퇴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HKND그룹의 실적과 공신력을 감안할 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돼 이번 운하 건설이 반드시 성사된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여태까지 몇 차례 팡파르를 울렸다가 헛소동으로 끝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점은 중국기업이 니카라과운하를 건설하겠다고 나선 사실이다. 설령 어떤 이유로 무산되더라도 다른 기업, 다음 기회가 있고, 중국의 자본동원력에 비춰 언젠가는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


한·미·중 컨소시엄에 기회 올 수도

중국 정부로선 니카라과운하가 하나의 ‘꽃놀이패’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언제든지 민간기업 프로젝트라고 연관성을 부인할 수 있고, 필요하면 뒷전에서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다. 중국은 니카라과운하를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중심이동(Pivot to Asia)’ 정책에 대한 대응카드로 쓸 수 있다. 건설주체인 HKND그룹은 프로젝트가 잘 풀리면 가장 좋고, 자금동원에 문제가 생기면 수익성 있는 부대사업 운영권만 챙기는 옵션을 택할 수도 있다.

니카라과 정부로선 운하건설 자체가 ‘대박’이다. 운하가 실제 완공된다면 건설비 400억 달러의 상당액이 니카라과에 풀려 경제가 활성화된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1인당 GDP가 현재 4400달러(2012년 구매력 기준)에서 2배로 뛸 수 있다. 혹시 HKND가 나가떨어지더라도 프로젝트 추진 자체로 중국의 다른 기업이나 다른 나라의 투자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큰 손해가 없다. 또 무산되더라도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2016년 대통령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면 오르테가에겐 큰 득이다. 프로젝트가 실패한 책임은 미국의 음모와 중국의 성의 부족으로 돌리면 된다.
물론 미국에겐 니카라과운하가 ‘눈엣가시’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먼저 눈을 깜박이면 슈퍼파워로서 체면만 구기게 된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이미 일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상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만의 하나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실제 완공 단계에 이르는 경우 미국은 이를 감내할 의사가 전혀 없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쿠바 미사일위기 때와 같이 강압적 수단을 써서라도 저지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뒷마당에서 벌어지는 공사에 훼방을 놓거나 망가뜨리는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지금은 묵묵히 지켜볼 뿐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조금이라도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가는 중국이 약점을 찾았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기 때문이다.

니카라과운하가 일개 중국기업에 의해 순조롭게 이뤄지기 어렵다고 한다면 미국에 의해 추진되기는 더욱 어렵다. 미국은 중국이 최근 한 것처럼 전국 고속철도망을 구축하기는커녕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샌프란시스코 구간에 건설하는 것조차 재정적으로 힘겨운 상황이다. 따라서 파나마운하와 중첩되는 니카라과운하에 투자한다는 것은 논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태평양과 대서양 간 물동량이 지금 추세대로 늘어난다면 제2운하 건설은 경제적 타당성이 충분하다. 이 경우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이 컨소시엄을 이뤄 니카라과운하 건설에 나서는 상황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한국은 한미동맹을 앞으로 상당 기간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 중국이 한반도 통일을 저지할 경우 중국과의 대결을 겁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최근 추세와 같이 중일 대립 맥락 속에서 한중 접근이 가속화할 경우 한미-한중 ‘이중동맹’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럴 경우 니카라과운하는 한미중 3국이 공동 추진할 수 있는 시범프로젝트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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