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급소’ 파나마운하

개통 100주년을 맞은 파나마운하. 확장공사가 진행 중인데, 최근 건설비지급 문제로 중단되는 등 난항을 겪고 있다. , <그래픽=김춘열>


자본 이익 위해 중남미 텃밭 싹쓸이한 ‘바나나전쟁’

미국이 중남미를 ‘뒷마당’으로 여겨온 데는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니카라과가 그 단면을 잘 보여준다. 미국인 윌리엄 워커는 185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병(私兵) 57명을 모집해 니카라과로 쳐들어갔다. 워커는 한 해 전 발발한 내전을 틈타 참전해 니카라과를 정복했다. 그는 1856~57년 니카라과 대통령을 지내고 노예제를 지지함으로써 남북전쟁 전야 미 남부에서 영웅이 됐다. 이렇게 사적으로 외국에 쳐들어가 영토를 차지하려 싸우는 모험가를 ‘필리버스터(filibuster)’라 한다.

필리버스터는 화란어의 해적이라는 말에서 유래해 스페인어에서 ‘해적질’이란 뜻이 됐고, 미 의회에서 쿠바에 대한 해적질에 반대하는 연설로부터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행하는 장시간 연설을 의미하게 됐다. 워커는 중미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결국 1860년에 온두라스군에 의해 처형됐다.?

니카라과는 이후 여러 차례 미국에 점령당했다. 아우구스토 체자르 산디노가 미 해병대를 상대로 싸운 것이 이 시기다. 미국이 니카라과를 점령하기 위해 보낸 해병·해군 병력은 최소 1000명에서 최대 2350명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군사령부 휘하 용산 주둔 20사단(朝兵團)과 나남 주둔 19사단(虎兵團) 등 2개 사단 규모 소수 병력으로 조선 전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했던 것에 비견할 만하다.

니카라과 점령은 1898년 미-스페인전쟁 이후 1934년 대공황에 따른 군사예산 감축으로 이른바 ‘좋은 이웃 정책(Good Neighbor Policy)’을 내세워 철군할 때까지 미국이 벌였던 ‘바나나 전쟁(Banana Wars)’의 일환이었다. 미국의 한 바나나 수입회사가 1911년 용병을 고용해 정권을 갈아치운 온두라스가 대표적 사례다.

1954년 악명 높은 유나이티드 푸루트 회사(United Fruit Company)의 사주로 미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쿠데타가 성공한 과테말라도 마찬가지다. 1898년 미서전쟁 당시 쿠바 및 푸에르토리코 침공을 시작으로 1903년 파나마 분리독립 개입, 니카라과 및 쿠바 점령, 아이티 점령(1915~1934), 도미니카공화국 점령(1916~1924), 멕시코와의 국경전쟁(1910~1919)과 베라크루스 점령(1914) 등이 바나나 전쟁에 속한다.?

스메들리 버틀러(Smedley Buttler) 미 해병 소장은 바나나 전쟁의 현장 지휘관으로 최고위 장성이었다. 그는 1935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33년 4달 현역생활에서 나는 대기업과 월스트리트를 위한 청부업자, 공갈배, 자본가의 깡패였을 뿐이다. 1914년 미 석유자본을 위해 멕시코 탐피코를 평정했고, 내셔널 씨티뱅크를 위해 아이티와 쿠바를 안정화했다. 1902~12년에는 브라운 브라더스 국제금융회사를 위해 니카라과를 싹쓸이했고, 1916년 미 설탕업자들을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을 정리했다. 1903년 미 과일회사들을 위해 온두라스를 다잡았고 1927년에는 스탠다드 오일(록펠러)의 중국사업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치웠다. 알 카포네는 시카고의 3개 구역에서 날뛰었지만 나는 3개 대륙에서 활동했다.”

버틀러 소장은 “전쟁은 소수 자본가그룹의 이익을 위해 다수 국민이 생명을 바치고 비용을 감당하는 부정한 돈벌이‘라고 단언하고 이를 막기 위해 3가지 구체적 제안을 내놓았다. 첫째, 전쟁을 하면 불이익을 받도록 한다. 전쟁이 나면 자본가와 군수산업가들을 가장 먼저 징집해서 일선에 배치한다. 둘째, 전쟁행위는 직접 싸울 사람들이 결정하도록 한다. 선전포고를 의회에 맡길 것이 아니라 제한적 국민투표에 붙인다는 제안이다. 셋째, 군은 방어용으로만 제한한다. 해군은 200해리 이내의 ’연안 해군(Coastal Navy)’으로 양성하고 육군은 국경선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제한함으로써 ‘침략전쟁(War of Aggression)’을 봉쇄한다.

버틀러는 미국의 소소한 전쟁들이 독점기업가와 금융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벌어졌다고 강조했지만 중미와 카리브해 지역의 미국의 군사행동은 또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중남미를 자국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으로 편입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1823년 미국이 몬로 독트린을 통해 미국이 유럽 대륙세력의 중남미에 대한 침탈과 식민화를 거부했을 때 미국은 이를 뒷받침할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때문에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축적한 경제력과 팍스 브리타니카의 해군력에 기반한 시장개방 및 자유무역 정책의 집행자로서 카리브해 지역에서 미국을 대행했다. 따라서 18세기 미국 독립전쟁과 19세기 초 미영전쟁으로 적대적 경색관계였던 미국과 영국은 21세기까지 이어지는 ‘특수관계(the Special Relationship)’을 이 시기에 형성했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겪고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중남미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이에 따라 미국은 중남미 신생 국가들에 대해 ‘맏형정책(Big Brother Policy)’을 밀고 나갔다. 1898년 미-스페인전쟁은 미국이 중남미에서 영국 세력마저 배제하고 독점적 관할권을 행사하게 되는 분수령이 됐고, 이후 대공황 때까지 미국이 중미와 카리브해 곳곳에서 벌인 바나나전쟁의 경과에 따라 맏형정책이 ‘미 제국주의’로 진전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국의 중남미 정책에서 최대 관건이 된 것은 1914년 8월15일 개통한 파나마 운하였다. 파나마 운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무역활동의 목줄이었을 뿐 아니라 적대적 해군력의 투사를 통제할 수 있는 급소였다. 미국은 콜롬비아로부터 파나마를 떼어내 독립시킨 다음 파나마 운하 양쪽으로 5마일(8㎞)에 이르는 지역을 파나마로부터 할양받아 ‘파나마 운하구역(Panama Canal Zone)’을 설정함으로써 영구 지배를 꾀했다. 이와 함께 미국은 1916년 니카라과 정부에 300만 달러를 지불하고 니카라과운하 무기한 옵션을 사들임으로써 장차 대체 운하가 경쟁자로 나타날 가능성을 없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