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디가?”

1986년. 가난했지만 웃음이 배불렀던 그 때. 맨 왼쪽이 필자, 그리고 필자를 보는 이가 아버지. <사진=최세진 제공>

1997년 7월, 늦은 장맛비가 추적이던 날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함께 있던 아버지가 머리를 감싸 쥐시더니 맥없이 축 쓰러지셨지요. 뇌출혈을 동반한 심장마비가 원인이었습니다. 이후 어렵게 맥박은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가는 호흡은 결국 주말을 넘기지 못했지요. 월요일 신문에는 드라마 <전우>, <적도전선>, <TV문학관> 등 선 굵은 350여편의 작품을 남긴 방송작가 최경식 씨가 5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는 부고 기사가 짤막히 실렸습니다. 17살의 어린 상주가 된 저는 빈소를 찾은 수많은 배우와 방송인들의 위로를 받으며 한 주 내내 의젓한 척을 해야만 했지요. 하지만 조문객이 뜸한 새벽에는 아버지 영정을 앞에 두고 하루 내 꾹 참아온 울음을 어린애마냥 꺽꺽 뱉어냈지요.

아버지는 방송작가였습니다. 서재 한 편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와 원고뭉치들, 담배연기로 누렇게 바랜 천장 벽지까지 아버지가 계시던 공간에는 창작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얼마나 뇌리에 남았는지 오죽하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런 모습을 시로 써서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지요.

아버지의 서재

밤새운 고통은
재떨이 하나 가득
꽁초로 남고
책상 위 얼룩진 잉크 자국들
당신의 피눈물도 함께 섞였다

동 트는 창가에
당신과 밤을 새운
바퀴벌레 한 마리
차갑게 식은 커피잔 곁을
매정하게 떠나간다

찢어진 원고, 구겨진 원고
공사판인양 어지러운 책상 한 가운데
드디어 정리된 다 쓴 원고 한뭉치
어느 보석이 그처럼 영롱하랴
아침 햇살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제가 10살 여름 때였습니다. 무더위가 한창이었을 그 때, 한번은 길을 걷다 아버지께 문득 이런 말을 했지요. “푹푹 찌는 더위를 주머니에 담아다가 겨울에 꺼내면 무지 따뜻하겠다”라고요. 아버지는 이 말을 너무 좋아하셨어요. 우리 아들 감성이 시인 같다면서요. 이 말은 아버지 작품의 대사로 쓰이기도 했다지요. 특별한 부자관계였습니다. 모딜리아니와 잔느처럼 극작의 영감을 주고받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와의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 저를 일군 소중한 재료들이었다는 것을요. 신기한 건 서른이 넘어서야 문득 아버지가 남겨주신 재능의 유산이 제게 머물고 있음을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지난 해 말 둘째를 출산한 누나도 연신 엄마 고생을 이해한다고, 이제야 알겠다고 말하더군요. 서른 중반을 앞둔 저에게도 아버지의 삶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 나이의 아버지가 품었을 인생의 진한 파토스가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1980년 3월, 아버지가 쓴 ‘도둑맞은 가난’이라는 단편극이 KBS를 통해 방영되었습니다. 당시 ‘비둘기장’이라 부르는 고단한 여공들의 삶을 조명하는 드라마였습니다. 이 작품은 방송 후 여러 공단과 공원으로부터 감사와 격려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지요. 그런데 그 해 5월, 아버지는 돌연 이 작품으로 삼청교육대에 수감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지요. 당시 중앙정보부가 아버지의 사상 검증을 하면서 지적한 대사내용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여공1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도와야 한다구. 부자들이야 우리 사정을 알기나 하니?
여공2 그럼. 그저 제 가진 거나 한 푼이라도 더 못 늘려서 눈이 새빨갛지.

그들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이 작품이 계급투쟁을 선동했다는 것이었어요. 아버지는 극구 오해가 있다며 소명했지만 소용없었지요. 결국 위의 대사 몇 줄로 ‘사회주의 고무 및 찬양’의 죄가 덮어 씌워졌고 이 때문에 삼청교육대에 수감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게 됩니다. 계엄의 시대에나 가능했던 슬픈 코미디였지요. 이후 1984년 사면되고 복권되었지만 그 상흔은 오래 갔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삼청교육대의 실상을 알리려 노력했고 다수의 작품으로 비뚤어진 사회상을 전하셨지요. 지금의 제 나이, 서른 중반 아버지의 삶은 이토록 진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친한 후배와 만났어요. 등산복 차림의 그는 아버지와 등산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지요. 무뚝뚝한 그에게 어디서 그런 효심이 생겼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은퇴하신 아버지가 무료해 하시기에 용기내서 등산을 함께 하자 했어요. 그날로 함께 등산을 시작했는데 이제 매주 주말이면 함께 오르고 있어요. 사실 놀랐어요.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거든요. 근데 신기한 것이 예전이었으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렸을 이야기들이 지금은 가슴에 와서 박히더라구요. 서른 넘어 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낼 줄 몰랐네요”

후배의 이야기는 훈훈했지요. 지난 해 큰 인기를 얻은 MBC ‘아빠! 어디가’도 소외되어가는 이 시대 아빠의 자리를 주목하게 만든 훈훈한 프로그램이었지요. 어린 시절, 우리는 모르는 게 있으면 ‘아빠!’하고 찾았었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육종(育種)되거나 품종이 개량된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형질은 고스란히 부모의 것에서 시작했으니까요. 그러니 부모로부터 보고 듣고 느낀 것이 곧 내 자신이요. 인생인 겁니다. 저명한 멘토의 삶보다 부모의 삶이 더 큰 지침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방법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 위대한 물음의 시작이 바로 이 한마디에 있으니까요. “아빠! 어디가?”

One comment

  1. 아.. 선생님 돌아가셨군요.. 최세진 씨, 아버지 도제였던 길명호입니다. 연락 가능하시면 메일 부탁합니다. pobeis@yahoo.co.ig. 선생님 돌아가실 즈음 전 인도네시아로 와서, 이제야 옛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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