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모든 것, 한인회에 물어달라”
언론인 출신 최연소 모스크바한인회장 김원일씨 인터뷰?
러시아 교수 아내와 네 자녀···”러 소식 정확히 전달됐으면”
김원일(45) 모스크바한인회장은 남들에게 별로 없는 ‘진기한’ 기록들을 몇 개 갖고 있다. 언론사 대표로 40대 중반 나이에 한인회장을 맡은 것, 러시아 엘리트여성과 결혼해 자녀를 넷이나 둔 점 등이 그것이다.
모스크바 한인들의 원격교육망 설치를 위해 방송통신대와 업무협약을 맺기 위해 지난 22일 한국에 온 김 회장이 29일 AsiaN을 방문했다.
-언제부터 한인회장을 맡았나?
지난 6월 경선을 통해 제6대 모스크바한인회장에 당선됐다. 현재 회원은 1500명 정도이며 모스크바에 3개월 이상 거주하는 한국인은 자동적으로 회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현재 모스크바엔 주재원과 장기체류자 등 5000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활동목표가 무엇인가?
‘한인회 정상화작업’이다. 2001년 구성된 한인회 사단법인 등록을 지난 12월13일 마쳤다. 이제 체계적으로 일할 수 있는 토대가 조금 마련된 셈이다. 임기 3년 동안 한인회를 정상화시켜 교민 활동의 구심점으로 만들 계획이다. 또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모스크바한인회의 투표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재외국인 참정권 행사는 교민사회의 단합을 도모할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김정일 사망 당시 모스크바 분위기는 어땠나?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관심이 많았다. 러시아는 정서상 북한과 가까운 편이라 그런 것 같다. 러시아 출신 아내가 한국에서 비상경계령을 내린 걸 보고 의아해 하더라. 외국인으로서 ‘김정일 생전에도 위기상황, 사망 후엔 더 위기상황’ 그런 걸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모스크바에서 호텔을 운영하며 <모스크바뉴스>와 <모스크바프레스> 등 두 개의 한인미디어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2003년 13살 아래의 러시아 여성 나탈리야(32)씨와 결혼했다.
-러시아에 둥지를 튼 얘기를 해달라.
외국계신용카드회사에서 일하다가 부친 사업을 물려받았으나 IMF 구제금융사태 이후 새로운 사업과 인생방향을 모색하다 1998년 모스크바로 가게 됐다. 당시 모스크바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동생(김은희 교수, 외국어대 등에서 강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1998년 2월 동업제안을 받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코로스톤호텔의 한개층을 임대해 호텔사업을 시작했다.
-러시아 아내를 만난 얘기가 재미있을 것 같다.
2001년 기숙사에서였다. 모스크바대학 기숙사는 대부분 서구대학처럼 남학생방과 여학생방이 뒤섞여 있다. 러시아 여학생 중 방청소를 매일같이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더라. 그게 지금의 아내다. ‘매일 방을 깨끗이 치우니 이 여자와 살면 최소한 집안은 깨끗하게 유지하겠구나’하는 믿음이 생기더라.
-국제결혼이라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맞다. 결혼 결심은 쉽지 않았다. 나보다 아내가 더 적극적이었다. 청혼을 받았지만 생각지 않던 국제결혼에 답변을 미루고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반대를 했다. 동생도 러시아 유학을 통해 국제결혼의 어려움을 알고 있어서 반대가 심했다. 아내와 본격적으로 사귀면서 ‘한국말을 잘 하고, 한국음식을 준비해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을 아내로 맞고 싶다’고 했더니 열심히 한국말과 음식을 공부하더라. 반대하시던 어머니가 모스크바에 와서 며느리감을 보는데 외국아가씨가 떠듬떠듬 한국말로 ‘당신 아들을 사랑합니다. 결혼하고 싶어요’ 하니 마음을 돌리시더라. 어머니가 계속 반대하시면 결혼은 못하니 어머니께 잘 보여야 한다고 협박해둔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김 회장의 부인 나탈리야씨는 모스크바대학 철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선 한국사를 전공했다. 한국어 공부가 크게 도움이 됐다고 한다. 나탈리야씨는 러시아 외무성 산하 외교아카데미에서 ‘1945~1948년 남한 사회지형과 정치투쟁’을 주제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씨가 박사학위를 받은 2009년 같은 해였다.
-외조를 잘 한 것 같다.
아내가 공부에 자질이 있었고, 소련이 무너진 후 젊은 사람들이 학계에 남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이 있었다. 당시 학자들 대우가 아주 좋지 못했는데 모스크바대학 정교수 월급이 불과 200~300달러 하던 시절이다. 게다가 한국학은 인기 있는 학문이 아니어서 젊은 한국학 학자가 귀한 때였다. 그래서 아내에게 한국학을 공부하도록 조언했다.
현재 나탈리야씨는 러시아 외무성 산하 동방학연구소 한국과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며 러시아국립경제대학교 동양학부 한국과 부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러시아어와 한국어는 물론,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하며 한국전문가로 손꼽힌다.
-아이들을 넷씩이나 낳아 기른다고 하던데.
결혼 전 아내에게 몇가지 다짐을 해두었다. ‘아이는 5명을 낳아줄 것’, ‘태어날 아이들은 한국유치원과 한국학교를 보낼 것’, ‘식사는 한국식으로 준비할 것’, ‘한국어머니에게는 적어도 일주일에 두번 이상 전화드릴 것’, ‘시댁식구를 항상 존중하고 시어머니 말씀은 절대 복종할 것’ 등이었다. 아이를 다섯명 낳아달라고 한 건 혼혈아로 자랄 아이들이 외로움을 갖지 않도록 하자는 생각이었다. 고맙게도 아내가 결혼 5년 만에 넷을 낳아주었다.
-이름이 특이하고 의미가 깊다고 들었다.
첫째가 연꽃 연(蓮). 올해 여덟살이다. 새로운 세상을 열라는 의미다. 둘째 서이(7살)는 서울의 ‘서’와 아내의 고향 이제프스크의 ‘이’를 조합했다. 내 인생관이 “천천히 가는 것이 이롭다”는 뜻에서 ‘천천히 서(徐) 이로울 이(利)’라는 한자이름도 두었다. 세째 래아(6살)는 ‘미래의 아가씨’라는 뜻이다. 일곱 달 만에 제왕절개로 태어나서 죽을 뻔하다가 살아 돌아온 아이다. 내가 좋아하는 공상과학영화 <스타워즈>의 공주 레아를 우리식으로 지었다. 딸을 연달아 셋을 낳으니 셋째 딸이 혹시 이름을 잘 지어주지 않으면 오해를 살까봐 일부러 공주이름에 우리의 미래라는 뜻을 주었다. 막내 세인(4살)은 한국계 러시아인이 아닌 ‘세계인’으로 살아가라는 염원과 함께 단군신화의 환웅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왔다는 의미를 담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3이란 숫자는 완성을 의미한다.
-아이들이 정체성 혼란 같은 것을 겪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이들 키우면서 “국적불명의 한국인이 아닌 세계화된 한국인으로 키우자”는 원칙을 세웠다. 러시아라는 환경에서 아이들에게 한국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모두 유창하게 구사하도록 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어는 부국어(父國語), 러시아어는 모국어(母國語)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러시아인이므로 부모국어 즉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도록 신경쓴다. 아이들은 한국음식을 잘 먹는다. 집에선 한국식으로만 먹기 때문이다. 특히 깍두기와 깻잎을 좋아한다. 위로 세 아이는 젓가락질도 잘 한다. 아내가 한국음식을 특히 잘하게 된 것은 우리 어머니가 몇 년간 모스크바에 와서 한국음식 교육을 한 이유가 크다.
-한국에선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은 게 사실이다.
아직 많은 한국인에게 러시아는 공산주의와 스킨헤드, 추위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여기에는 본국 언론사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에는 구소련지역을 포함해도 KBS와 연합뉴스 단 두개의 언론사만이 특파원을 파견하고 있다. 그래서 양국이 상호 정확한 이해를 위해 도움되는 일이라면 나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하여 <모스크바뉴스>와 <모스크바프레스>를 창간하게 됐다. 무엇보다 러시아에 대해 편향되지 않은 보도를 하고 싶고 러시아인들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싶다.
김 회장은 “러시아의 한국관련 정책 기사들을 깊이있게 보도하고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한국인과 한국기업에 대해서도 적극 취재해 알리고 싶다”고 했다.
김 회장은 모스크바한인회 활성화를 위해 내년 3월 한국문화원(원장 양민종) 협조로 ‘문화센터’를 오픈할 예정이다. 기자와 순대국으로 점심을 한 김 회장은 “러시아에서 맛볼 수 없는 순대국은 역시 토종 한국음식”이라며 “모스크바 한인들의 원격교육을 위해 원광디지털대와 업무협약을 맺었고 오늘은 한국방송통신대 총장님을 만나 업무협약을 추진해야 한다”며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