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칼럼] 젠더기반폭력③ 법, 제도, 사회적 지원 3박자 맞아야 방지 가능
흔히 지구상의 모든 여성 3명 중 1명은 일생 중 최소 한번 이상 남편이나 동거남 등 친밀한 파트너로부터 언어적, 물리적, 성적 폭력을 경험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정폭력은 대단히 만연한 형태의 젠더기반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해외원조기관인 USAID가 2008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매해 15~49세 사이 여성 2만여명이 폭력의 피해를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정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이 HIV/AIDS에 노출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남아프리카 여성 136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매맞는 아내’가 그렇지 않은 여성들보다 HIV/AIDS에 감염될 확률이 48%나 높았다 .
성폭력은 낯설고 위험한 사람들로부터 당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친밀한 관계, 예를 들면 남편, 아버지, 남자친구, 친척, 이웃 등 가까운 관계에서 발생하는 빈도가 훨씬 높다. 그리고 가정폭력이 성폭력을 동반하는 경우도 대단히 많다. 이는 폭력이 권력관계의 산물이며, 가정 내에서 남편과 부인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남편이 부인을 지배, 통제,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물리적 폭력과 성폭력을 자행하기 때문이다. WHO가 10개국 여성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성건강과 가정폭력에 관한 WHO 다국가 연구’에 따르면 가정에서 물리적 폭력을 경험한 여성의 30~50%가 물리적 폭력과 성폭력을 함께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WHO에 따르면 성폭력이 HIV 감염 가능성을 높이는 이유는 여성이 물리적 폭력이나 폭력위협으로 인해 안전한 성관계를 협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어렸을 적에 아동성폭력에 노출됐던 여성은 HIV와 관련한 위험한 행위 즉 약물중독, 여러 명의 파트너 등에 노출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남성에게 유리한 불공평한 이혼제도, 이혼 후 부족한 경제적 자원, 이혼녀에 대한 낙인, 제도적 지원미비 등도 여성이 폭력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성폭력이 약자를 지배, 통제,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은 분쟁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성폭력 사례를 통해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무력분쟁 도중 발생한 인종청소 및 성폭력 사례는 성폭력이 이미 개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을 넘어 한 사회를 붕괴시키기 위한 무기로써 자행됐음을 쉽게 알 수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최근까지 구 유고슬라비아, DR콩고, 르완다,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우간다 북부, 체첸 등 분쟁지역에서 이 같은 여성대상 폭력이 대거 발생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성폭력이 조직적, 집단적으로 자행되고 있는데 국제사회는 이를 ‘전쟁무기로서의 성폭력(sexual violence as a weapon of war)’이라 지칭한다.
전쟁으로 인한 또 다른 비극은 여성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 등 사회적 지지를 잃을 뿐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성매매’에 나설 수 밖에 없게 만든다는 데 있다. 성폭력으로 인해 사회적 낙인이 찍힌 여성 피해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또는 음식, 잠자리, 또는 생필품을 얻기 위해 성매매에 나서기도 한다. 젠더기반폭력이 더욱 문제시되는 이유는 무력분쟁지역의 경우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에 대해 수용적인 사회, 문화적 환경이 조성된 데다가, 가해자 처벌법이 없거나 있어도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고 경찰, 보건, 기타 서비스당국이 아예 조사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젠더기반폭력은 사회, 문화, 구조적 원인이 깊이 자리잡은 문제이기 때문에 한 가지 사업만으로는 효과를 보기 어렵다. 가정폭력, 성폭력예방캠페인, 폭력예방교육 같은 사회적 인식 촉구와 교육 그리고 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제도적, 사회적 지원이 결합되어 사회 속에서 실천될 때 젠더기반폭력이 종식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