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과 율곡이이, 작가의 손끝에서 해후하다

서울 평창동의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일랑 이종상 화백. <사진=김남주 기자>

화폐에 ‘모자지간’ 담은 이종상 화백, “서명해준 돈은 대박? 끝자리 맞춰와라”

5만원짜리 화폐를 두 팔로 마음껏 들어볼 수 있다면 액수로 얼마쯤 될까? 상상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데 실제로 들어본 사람이 있다. 바로 5만원권의 얼굴인 신사임당을 그린 일랑(一浪) 이종상 화백. “양손 가득 들어봤는데 한번에 22억~23억쯤 들 수 있더라고요.” 지난 2009년 신권이 발매되면서 기념촬영을 한 자리에서 그런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5000원권 율곡 이이에 이어 5만원권 신사임당까지 화폐 주인공을 한명도 아닌 두명이나 그린 화가, 그리고 그 화폐 주인공이 모자지간인 경우는 전 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화폐작가로 유명한 이종상 화백(75)을 만나 돈에 얽힌 뒷이야기, 그리고 그의 남다른 인생이야기를 들었다.

2009년 6월 15일 경산조폐공사에서 오만원권 최종 점검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했다.

“내 작품을 수장하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작가는 나밖에 없다. 누구의 주머니를 뒤져도 내 작품을 갖고 있다. 전 국민이 갖고 있지 않나. 내 작품이 없으면 가난하다.” 이종상 화백은 유쾌하게 말을 꺼냈다. “거기에 내 사인을 받으면 값이 100배가 뛴다고 한다. 이렇게 고부가가치 창출이 어디 있나.” 그의 사인을 받은 5만원권을 경매에 내놓으면 500만원이 된다고 하니 귀가 솔깃한 말이 아닌가? 사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전에 한 협회 사람들이 초청해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강의가 끝났는데 질문도 없다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5000원짜리 화폐에 사인을 해달라고 줄을 서는 것이다.(그 당시는 5만원짜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다 해주나. 못해주고 도망쳐 나오듯 집으로 돌아왔는데, 협회장이 따라와서 신신당부를 하더라. 국제적인 약속을 꼭 지킬 일이 있어서 그렇다면서. 그래서 할 수 없이 협회원들이 가져왔다는 돈에 사인을 해줬는데 그걸로 100배를 받고 팔아서 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렇게 중국 낙양성에 소학교를 지어줬다더라. 후원을 약속했는데 후원금을 모으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터였단다. 학교 앞에 세워진 오석비에 내가 후원회장으로 돼 있다던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화백에게 지폐 사인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명한 돈이 시중에 돌아다니면서 시비가 없게 하려면 일일이 일련번호를 적어 놓아야 한다. 또 기념이면 몰라도 경매로 100배 이상 돈을 받는다니 아무에게나 해줄 수도 없다.

화폐에 그림 그리려면 4대기관 뒷조사 받고 소위 ‘십계명’ 지켜야

2009년 오만원권 화폐 초상인 신사임당 영정 앞에서 이종상 화백이 활짝 웃고 있다.

이종상 화백이 5만원권에 신사임당 영정을 그린 것은 71세인 지난 2009년. 그런데 5000원권에 율곡 이이의 영정을 그린 것은 불과 37세인 1975년의 일이었다. 두 번이나 화폐에 그림을 그린 것도 그렇지만, 삼십대의 나이에 어떻게 화폐작가가 되었던 것일까.

“원래는 이당 김은호 선생(1892~1979)이 5000원권에 들어갈 율곡 이이 영정을 그리기로 돼 있었다. 순종 어진(御眞)을 그린 조선시대 마지막 화원이시다. 대학 때 그분을 찾아가서 초상화를 배웠었다. 표정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숨어서 톡 건드리면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서양의 순간포착이 아닌, 많은 시간의 세월을 압축해서 그린 그런 표정을 그분에게 배웠다. 그런데 이당께서 몸이 편찮으셨다. 그래서 한국은행이 율곡선생 동상을 사진 찍어 영국에 보낸 뒤 화폐 디자이너들에게 그려달라고 했는데, 조각품이어서 그런지 받아보니 서양인처럼 보이는 거다. 1978년 당시 5000원권은 3일 유통되고 회수됐다. 다시 한국은행이 70세 넘는 화가들 중 화폐작가를 수소문했는데 청빈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당 선생이 나를 추천했고, 나도 모르게 4대 기관에서 조사를 다 받은 뒤 율곡 이이 영정을 그리게 된 것이다.”

화폐 작가 후보를 물색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이력, 금전관계는 물론이고 친인척 재산까지 모두 조사했다는 것이다. “화폐작가가 돈 문제가 있다면 그 돈을 쓸 수 없으니 그런 거다. 그 당시 나는 벽화를 공부한다며 초가집에 살았었다. 화폐 작가가 되려면 ‘집에서 그림 팔면 안된다’는 등 소위 십계명이 있었는데, 그걸 다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림을 그렸다.”

대학 때 4.19혁명 주도, 국전 출품작엔 ‘민주화와 혁명’ 담아

그 실력이 어디서 나온 건가 봤더니 의외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종상 화백은 건국포장을 수상한 국가유공자란다. 4.19혁명 동지회였다고 했다. 서울대 회화과 2학년 때 4.19에 참여해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이듬해인 1961년 국전 자격이 주어지자마자 작품을 냈다. 그때 그린 주인공이 ‘노동자와 농민’. 최연소 특선을 했다. 민주화와 혁명을 의미하는 그림을 내놓았던 것이다. “화가로 출세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그림에서 입선만 하면 내 그림이 포스터처럼 전국 대학생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혁명을 의미하는 그림이 뭐가 있을까. 바로 ‘대장간’이다. 조선시대 김홍도의 대장간도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민들이 민주화를 일으키는 사회가 돼야 한다 생각했다. 심사위원들이 그 의미를 못 알아보고 그림을 뽑았는데, 몇몇 친구들이 알아보고 걱정해줬다. 4.19를 일으킨 경험도 있는데 겁나지 않았다.”

대장간이 왜 혁명을 의미할까. “대장간은 헐고 무뎌진 호미, 칼날 등 연장을 벼리는 곳이다. 못 쓰는 고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이 바로 혁명을 암시한다. 당시 군사정권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어릴 때 할아버지를 따라 고철을 주우러 다녔는데, 몇 년 뒤 할아버지가 그 고철을 대장장이에게 가져다주시더라. 흩어진 못들은 돌멩이만도 못하지만 모으면 농기구가 되고 곡식을 생산하고 배불리 먹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그 기억으로 다시 대장간을 찾아가 당시 내 나이 또래 대장장이들을 ‘노동자’의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이후 이종상 화백은 국전에서 3년 연속 특선을 하며 추천작가가 됐다. 실력을 인정받을수록 더 큰 일을 생각했다. 5.16을 기념하는 제1회 신인예술상(1962년)에도 출품해 상을 받았다. 상금이 엄청났는데, 당시에도 노동자를 그렸다. “함께 노숙하면서 자는 걸 그렸다. 군더더기도 있고 가만히 자니까 그리기도 좋은데, 자꾸 내가 그리는 걸 보면 일어나서 앉고 그러더라. 그때 속사(速寫)를 하게 됐다. 깨기 전에 그려야 하니까. 그들은 내 현실이자 측근이었다.”

“독도에서 고구려까지, 나는 손이 마렵다”

사회와 역사의식에 대한 고민과 실천은 고구려와 독도로 이어진다. “죽의 장막이 걷히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고구려벽화를 연구하다보니 사회주의 작가로 몰려서 남영동에 끌려가 고문도 당했다. 벽화는 ‘시간’개념이다. 이전 암각화까지 모아보니 우리 민족은 남방 도선문화, 북방 대륙문화, 그리고 시베리아 유목문화가 합쳐진 다문화였다.”

북한 초청으로 방북한 1999년 이종상 화백이 덕흥리 벽화를 관찰하고 있다.

이종상 화백은 1977년 독도를 찾아가 그림을 그렸다. 한일간 논란이 있었고,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가 나오기 5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일부에서 ‘독도 고지도’를 찾더라. 지도의 어머니는 풍경화인데, 우리나라고 일본이고 독도 그림이 없더라. 그래서 내가 독도를 그렸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화가가 6배나 많지만 다케시마를 그리는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는 독도를 그리는 화가가 500명이다. 우리가 ‘문화적 영토’를 선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울릉도 독도박물관에 ‘최초의 독도그림’이 있는지 확인하러 온다.” 이 화백의 독도 그림은 스카프로도 만들어져 일본 여성들이 두르고 다닌다고 한다.

독도일출(2011년, 지두화)

“가장 미시적인 것은 가장 거시적인 것과 통해”

정밀한 화폐 그림부터 폭이 80m가 넘고 무게가 200t이 넘는 돌벽화까지 공간과 시간을 넘나드는 이종상 화백은 “가장 미시적인 것은 가장 거시적인 것과 통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창작 비법도 공개했다. “무언가 구상을 하려면 선잠을 잔다. 화판 위에 베개 없이 불편하게 누워 자면,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엄청나게 큰 벽화의 밑그림이 손톱만해지는 순간이 온다. 오래 응시할수록 익숙해지고 만만해진다. 처음엔 엄두가 안 나던 것이, 걸림돌이던 것이 디딤돌이 된다. 화판을 정복하듯 상대를 정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에 함께 자리한 이상기 발행인이 ‘쿠웨이트 여자’라는 시집을 낸 쿠웨이트 수아드 알사바 시인에게 이종상 화백의 서명이 담긴 화폐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더니, 이 화백은 이렇게 답했다. “5000원권과 5만원권의 일련번호 끝자리라도 맞춰서 가져와주세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한스러워했던 아들인데, 모자지간을 그린 것도 인연인 제가 지금이라도 그들을 연결해줄 수 있게 말입니다.”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2008년, 태백산맥문학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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