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리포트] ② 침묵의 버마, 입을 열다
*최방식 ‘인터넷저널’ 편집국장이 지난 3월16일부터 23일까지 버마를 현지 취재한 여행기 중 두번째입니다. 버마 취재는?나르기스 피해지와 만달레이 인근 사막화 현장을?조사하는?민간조사단을 수행하며 이뤄졌습니다. 버마 이야기 속으로 떠나보시지요.
수치와 NLD, ‘버마의 봄’ 맞이하려나
양곤에서의 이튿날 여정은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 본부에서 시작합니다. 외신을 통해 사진으로만 봤던 곳. 70여 평 낡고 허름한 3층 건물. 1층은 기념품매장입니다.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더니, 줄지어 상품을 고르네요. 재정적 기여도 꽤 할 테지요.
조산 NLD 사무국장이 건물 앞으로 마중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망명자로 11년을 살다 귀국한 낀조의 친형. 낀조는 여행팀 안내를 맡고 있고요. 우띠누 부의장 면담을 신청해놓고 조산 국장과 부속실 직원 마틸다와 담소 중인데 들어오랍니다. 수치 여사는 수도 네피도에 있던 중 북부지역으로 출장을 갔다네요.
NLD는 1990년 총선에서 전체 의석의 80%(495석 중 392석)를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습니다. 1988년 친위쿠데타와 민주화운동 탄압으로 민심이 악화되자 신군부 정권이 취한 유화조치 정국에서 거둔 열매죠. 하지만 군부는 선거결과를 무시하고 수치를 가택에 가뒀죠.
‘5·18광주민중항쟁’과 비교되는 ‘8888민중항쟁’. 네윈 군부의 26년(62년 쿠데타 뒤)에 걸친 가혹한 탄압과 경제파탄에 들고 일어선 버마인들의 대항쟁. 한국의 ‘87년 대투쟁’ 때 버마에서도 민주화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는데, 이듬해 3월과 6월, 그리고 8월로 이어졌죠.
허름한 3층 건물, NLD본부
8월 8일 오전 8시. 항만노동자 파업을 신호로 학생들이 주도한 거리시위에 스님, 주부, 노동자, 직장인 등 10만여명이 참여했죠. 경찰과 군부의 강경진압에도 시위는 커졌고, 9월 14일에는 수백만명이 참여할 정도. 네 윈이 물러나고 소마웅(Saw Maung) 등 신군부가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며 ‘피의 학살’을 주도했습니다.
9월 18일까지 이어진 ‘신군부’의 유혈진압으로 3000여명이 사망·실종되고 수천명이 수감됐다고 전해지지요. 정글로 숨어든 이들은 ‘버마학생민주전전’(ABSDF)을 결성, 무장투쟁을 시작했고요. 그 해 4월 어머니 병환으로 해외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아웅산 수치는 9월 24일 NLD를 결성했죠.
수치와 NLD의 역경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수치는 노벨평화상 수상 때도, 남편이 사망했을 때도 못 갔죠. 가택연금만 15년. NLD도 사무실이 봉쇄돼 태국 치앙마이에 ‘NLD 대리본부’를 뒀죠. 유럽, 아시아, 미국 등 세계에 흩어진 지부를 관리하느라. NLD코리아(의장 내툰 나잉, 44·남)는 1999년 설립돼 31명의 회원을 두고 있죠.
우 띠 누 NLD 부의장(86·남) 방으로 가는 길. 건장한 청년 여럿이 길목을 지킵니다. 마주앉자, 오기출 푸른아시아 사무총장이 기후변화 관련 여행목적을 설명했죠. 사이클론(인도양에서 생기는 태풍) 나르기스로 14만 여명이 사망한 재난, 중부 고원지대 만달레이 인근 사막화의 심각성을 묻고 관련활동(온실가스 줄이기 등)을 현지에서 벌이려 한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띠누 부의장, 환경에 나름 관심이 큽니다. “이 나이 되도록 그런 태풍은 처음 봤어요. 사이클론은 통상 방글라데시쪽으로 지나가는데, 나르기스는 하이지섬에서 버마 본토로 올라왔거든요. 그런 경우가 처음이죠. 2010년에도 또 한번 작은 태풍이 그 길로 온 적이 있죠. 우 툰 르윈 당시 기상청 박사가 이틀 전에 예고했지만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은폐했죠.”
부의장은 기상관련 정책이 형편없고, 부정부패로 혈세가 낭비되기 일쑤였다고 했습니다. 요즘엔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바뀌고 있어 다행이라네요. 국제사회 지원에 대해서도, 처음엔 정부가 거부했으나 유엔 사무총장 방문 뒤 여러 나라·국제기구·NGO 지원이 들어왔지만 지속적이지 않아 안타깝다고 덧붙였습니다. 정부지원도 있었는데, 갚아야 할 빚이라고.
우 띠누 부의장 “집권 낙관”
부의장은 온난화로 지표면·지하수 고갈이 심각해 NLD차원에서 집권전략으로 기후변화관련 환경기구 설치를 고려할 수 있다며 관련 제안서를 주면 수치에게 건네고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NLD집권 플랜을 묻자 띠누 부의장은 “국민이 원하면 하겠다”는 수치의 발언을 예로 들며 가능성이 크다고 했습니다. 헌법상 대통령 출마자격이 없기는 하지만 개헌을 통해 가능하다고. 집권여당과 협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제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한다는군요.
우띠누 부의장을 만나고 나오는 데, 한쪽 벽에 NLD 국회의원 당선자 지도가 붙어있습니다. 지난해 4월 치러진 50개 선거구 재보선에서 43석을 얻은 것. 소마웅 신군부로부터 92년 권력을 넘겨받아 20여년 군림해온 탄 쉐 정권. ‘7단계 민주화이행 로드맵’에 따라 민간정부를 세우고 처음으로 야당이 참여한 보궐선거에서 NLD가 그 화려한 부활을 알린 것입니다.
7단계 로드맵은 92년 들어선 탄쉐 군부정권이 이듬해 내건 장기공약. ‘8888항쟁’ 때 폐기됐던 헌법을 2008년 제정했고, 정치범을 일부 석방했으며, 자유언론을 등장시켰고, 무장투쟁 중인 소수인종에 대화하는 유화정치을 폈죠. 2011년 총선(야당 배제)을 통해 의회를 구성하고 새 대통령(테인 세인)도 앉혔으니 흉내는 다 낸 셈.
안을 들여다보면 좀 다르죠. 탄쉐 정권의 총리가 대통령으로 앉아 있거든요. 헌법에 의해 상하원 의석 1/4(개헌저지선)은 군인에 할당하죠. 일당총선으로 의회 절대다수를 군부정당이 차지했고요. 수치의 대통령 출마자격은 헌법으로 막아놓고. 민간정부를 가장한 군부통치의 연장술수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죠.
유화조치만도 어리둥절할 정도. ‘버마의 봄’을 향한 진전이라고 할까요. 민주세력과 서방세계의 공이 컸죠. 수치의 유연한 태도나 서방을 향한 경제제재 해제 호소도 도움 됐고. 온건개혁 군부세력도 한몫 거들고. 자원과 농업 부국인데도 중국의존 경제로 파탄지경에 이른 군부. 선택할 길이 많지 않았을 테죠.
마지막 관문 개헌, 시동 건다
군부에겐 불안한 앞날도 걱정거리였죠. 1988년 소마웅 군부정권 때 친위쿠데타를 주도했고, 1992년에는 소마웅을 제거하고 직접 권력을 움켜쥔 탄쉐. 권력향배에 따라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보험’이 필요했을 터. 2년전부터 터져 나온 ‘아랍의 봄’과 독재자의 운명도 반면교사가 됐을 듯. 권력분산과 민주화라는 두길보기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죠.
수치 말대로 ‘자유·민주화를 위한 낙관적 미래’가 다가올지는 두고 봐야죠. 2015년 총선에서 NLD가 자유·민주 선거로 참여할 수 있을지 아직 불투명하니까요. ‘외국인 남편과 자녀를 둔 경우’ 대통령 자격을 박탈한 헌법조항도 문제. 글을 쓰는 중, 집권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관련조항 개헌을 검토중이란 외신이 전해지네요.
‘버마의 봄’이 다가오는 것일까요. 하기야, 어둠도 겨울도 제아무리 가혹하고 길어도 마침내는 빛과 봄에 자리를 내줘야 하는 이치. 세상을 거꾸로 돌리려는 ‘반역’은 늘 물거품이 되는 게 역사의 가르침이니까요. ‘춘래불사춘’이라는데. 꽃샘추위도 있다는데. 빛과 봄이 더 찬란한 까닭이겠죠?
수치와 NLD의 행보에 우려 목소리도 있습니다. 여사의 올 초 한국방문 때도 들렸는데, 군부정권에 너무 타협적이라는 비판이었죠. 이용당하고 ‘팽’ 당할 거란 우려죠. 한국의 ‘3당야합’처럼 수치가 군부세력과 권력을 분점 할거란 우려도 없잖고요. 정치에 선악은 없다지만, 최선을 선택하길 바랄 뿐입니다. 버마식 집단지성이 필요한 때로 보이네요.
NLD본부를 나오며 기념품을 몇 개 골랐습니다. 이어 사이클론 나르기스와 중부 사막화 관련 환경전문가를 만났습니다. 가난한 농산촌 마을개발과 환경보전 활동을 하는 이들. 지력과 자연자원을 보존·보전하는 지속가능한 삶을 연구개발하고 현지인에게 교육하는 일을 하는 이들.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텟 파이 툰(남)과 에유 느웨(여)는 ‘8888항쟁’ 뒤 정치범으로 수감생활을 했던 이들의 모임인 LPP(석방양심수연맹) 활동과 함께 유기농교육단체를 운영하는 이들. 농민 교육활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버마에서 기후변화 환경운동을 벌인다면 적극 돕겠다고 했습니다. 텟 파이 툰은 할리우드 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닮아 인기 ‘짱’이었죠.
15년 감옥살이 떼우, ‘독서운동’
환경운동을 하면서 개인사업을 하는 조우(남)도 유사한 활동가. 국경지역 농민들의 경우 중국·인도·베트남에서 오는 비료·농약을 사용하는데, 언어가 달라 해독이 안돼 대충 쓰다보니 오염된 농산물을 생산한다며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한 활동가는 기자가 태국 북서부 버마난민촌을 취재한 적이 있다고 했더니, 나르기스 뒤 그곳 인구가 크게 늘었다며 ‘환경난민’의 처참한 삶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LPP 활동가라면 우리 여행을 안내하는 떼우을 빼놓을 수 없죠. 낀조와 ‘8888항쟁’ 때 함께 거리투쟁을 했다는 떼우. 신군부에 쫓겨 정글로 이동 중 붙들려 1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고. 부인도 7년 교도소 생활을 했고요. 아내가 노점상을 해 가정을 꾸린다고. 떼우는 감옥에서 3000권의 책을 잃었다며 도서관 살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답니다.
떼우의 슬프고도 우스운 이야기. 감옥살이를 끝내고 집에 와보니, 어떤 여성이 배가 ‘남산’만 해 누워있었다나. 깜짝 놀라 “누구냐”고 물었더니, 글쎄 수감 때 꼬마였던 딸이 어느새 결혼하고 임신해 그런 것이었다고. 떼우처럼 LPP가 전국적으로 도서관 살리기 캠페인을 하는데, 100여개가 넘게 생겨났다네요.
여행자들은 석양녘 한 시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마웅 세인 윈.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 중인 유종순 시인에 따르면, 다공 따야(94·남)와 함께 버마 최고의 인기작가라 하네요. 만해축전에 초대받아 방한한 적도 있고요.
한적한 주택지를 10여분 헤매다 찾은 코코넛 숲에 둘러싸인 집. 현관에 마주앉는데,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 딱 그 것입니다. 각종 저작 시집과 관련 삽화들로 장식돼 있는 벽장 앞 그의 소파와 재떨이는 담배부스러기로 수북합니다. 여행자들과 마주 앉으면서도 담배부터 뭅니다. 권하는 것도 잊지 않고.
대화 중 기상학박사 우 툰 르윈을 점심 때 만나기로 했는데 안와서 걱정이라 했더니, 시인이 친구라며 전화를 집어듭니다. 집으로 오고 있다니 걱정 말라네요. 내일 아침 현지조사를 떠나야 하는데 천만 다행입니다. 또 하나 걱정거리. 에야와디 삼각주까지 갈 차(렌트)를 못 구했다고 했더니, 아들이 여행사를 운영한다며 역시 전화 한통으로 해결했습니다.
양곤의 석양, ‘리라꽃맹세’ 선율
잠시 뒤 도착한 툰 르윈. 그의 증언은 꽤 충격이었습니다. 르윈 박사는 나르기스 닷새 전 인도양(아시아) 연안 국가(28개 국가)와 국제기구가 가입해 운영되는 ‘지역위험조기경보시스템’(RIMES, 르윈 박사 태국지부 운영)을 통해 그 위험을 예고했고, 군부 서열 4~9번을 포함해 수백명의 정권 실력자들에게 주민대피령을 내려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무산됐다고 했습니다. 이틀 전에는 언론에 호소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요.
르윈에 따르면, 나르기스는 세계 8대 태풍 중 하나. 버마에서는 제일 큰 규모. 경험이 없고, 에야와디 삼각주가 저지대고(실제 당시 42%가 잠김), 태풍이 몰아치면 피할 데가 없으며, 재해예방 수칙이나 정책이 없고, 정보가 없어 그리 된 것이라고. 자신의 분석을 알려줬습니다. 현지조사 관련 정보도 줬죠.
마당 한쪽에서는 음악소리가 은은합니다. ‘오즈의 마법사’ 오리지널사운드트랙 ‘무지개 너머’(Over The Rainbow)가 양곤의 석양을 곱게 물들입니다. 아들 친구들인데, 순회공연이 있어 연습중이라네요. 이어진 비올라와 기타 합주. 라일락(리라꽃, 아름다운 사랑의 맹세)에 얽힌 사랑이야기 베사메무쵸(더 키스해 주세요)가 흐릅니다. 여행자들에게 휴식과 황혼의 고즈넉함을 선사하네요.
“나에게 더 키스해 줘요/…마치 오늘 저녁이 마지막인 것처럼/ …나중에 너를 잃을까 봐 두려워/ 널 정말 가까이서 가지고 싶어/ 너의 눈 속에 있는 나를 보고 싶어/ 나와 같이 있는 너를 보고 싶어…/ 난 내일 아침에는/ 이미 여기서 멀리 있을 거라고 생각해…/ 베사메무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