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영의 CQ] 아메리칸의 ‘아시안 드림’
1990년대 초 관광개발 컨설팅을 위해 아시아국가들을 나비처럼 가볍게 드나들던 파란 눈의 외국인이 있었다. 가끔 서울에 들르게 되면 차를 마시면서 본인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 상황을?듣기도 했는데 그때도 생각했지만 그 친구는 영민한 비즈니스맨이었다. 아시아에 돈이 있다는 걸 아는 친구였다.
며칠 전 나와 비슷하게 생긴 어린 여자아이를 입양한 미국인 커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직접 서울로 가서 입양절차를 밟았고 미국에서 훌룽하게 교육을 시키고 잘 키우겠다고 친척들에게 약속했다 했다. 기회가 되면 자주 한국에 보내서 한국사람이란 것을 잊지 않게 해주고 싶다 했다. 애틋한 마음에 살짝 잡아본 고사리같이 작은 아이의 손, 아직도 온기가 느껴진다.
금발의 친구가 있다. 아시아로 여행 한번 해본 적 없고 가족 친척 어느 누구도 아시아에 닿은인연줄 한가닥 없는 친구인데 석사졸업해서 아시아에 가서 살고 싶어한다. 잠시 여행이 아니다. 아예 정착하고 싶어한다. 일도 하고 집도 사고 결혼도 하고 투표도 하고 세금도 내면서 살겠다 한다. 서울, 도쿄, 홍콩, 싱가포르 어디가 살기에 나은지 물어본다. 서울 빼고 살아본 적 없고 너의 질문에 깊이 고민해 본 적 없으니 나에게는 답이 없다고 매정(?)하게 얘기했다.
내가 만난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아시아문화에 남다른 호감을 갖고 있었고 아시아인의 고유한 생각과 생활방식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간혹 아시아문화를 비하하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일그러지던 나의 얼굴은 이들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워 보이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띤 얼굴로 철학선생님, 윤리선생님, 역사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가끔 아시아인의 고향 속으로 들어가 사회와 국가의 기본단위인 가족을 ‘창조’하고 싶어하는욕구를 지닌 앵글로색슨 후예들을 본다. ‘아시아이민 1세대’ -? 이것이 그들이 창조하고픈 꿈인 것이다. 그들은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자격이 있다 생각했다. 대체 어떤 매력이 그들이 아시안드림을 갖게 되는?상황으로 이끌었을까. 놀아도 밖에서 놀고 싶었고 기름진 넓은 곳에 가면 뭔가 있을 것같아 거꾸로 미국으로 날아와 정착한 나에게는 호기심을 넘어 의아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어릴 때부터 내가 늘 “저것 때문이야”라고 생각했던 것들, 예를 들면,?조직의 기본을 흔들고 기업과 나라를 망치게 하는 주범이라고 내심 오랫동안 의심과 비판의 눈초리로 바라보던?’온정주의’를 이들은 미덕으로 여기는 부분이 있었다. 셋만 모이면 형님 동생이 결정되고 식당만 가도 이모 삼촌이 있고 고향/학교/직장/사회 선후배의 밀고 당겨주는 따뜻한 (?) 종속관계를 이들은 삶의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받아들이고 또 이것을 어느 정도는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전문가의 역사적 문화적 해석이 어떻든지?간에, 밥을 먹었는지 매일 물어보고 남의 생리적 고충마저 내일처럼 일일이 알고픈 우리네 기본적 온정주의는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계약으로 움직이는 파트너십 시스템에 익숙한 그들에게 오히려 현명한 삶의 방식으로 여겨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해가 될만도 하다. 급변하는 가족시스템 변화과정을 겪고 있는 사회에 사는 이들이 아시아 특유의 전통적 가족관계와 온정을 바탕으로 한 이해관계를 판타지로 볼 수 있다고 본다. 가족에 대한 정의가 수정 확대되고 우리 국어사전에서 찾아보기 힘든 새로 생겨나는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예를 들어, half sister, step sister, quarter sister, bridge sister, skip sister, half mother 등) 가족의 울타리 범위는 땅따먹기 놀이하듯 점차 넓어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룹보다 개인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더욱더 정서적 구심점을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주위 사람들에게서 관찰된 이러한 현상에 나름 의미를 부여해본다. 그렇다. 이제 인류의 새로운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이동의 역사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아 동굴에서 산으로 바다로, 종교의 박해를 피해 신념과 영혼이 자유로운 곳으로, 산업화로 인해서 시골에서 도시로, 전쟁을 피해 전쟁터에서 평화가 있는 곳으로,?관광을 하기 위해 지루한 일상에서 새로운 곳으로…. 미래는 ‘사람’ 그리워 포근한 정서가 충만한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뼛속까지 물질기계 만능주의의 폐혜를 경험할 인류는 비인간적인 곳에서 인간적인 곳으로 움직일 것이다.
아무리 똑똑한 로봇이 동화책을 읽어주고 아파 누웠을 때 간호를 해준다 한들 인간의 감성을 대신해 줄 수는 없지 않는가. 하루 24시간 중 페이스북 3시간, 트윗 3시간, 이메일 읽고 답장하고 3시간, 문자보내고 채팅하고 3시간 등 기타 수많은 시간을 말 없는 기계들을 매개로 원활한 소통이 진행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람들의 소외감과 불안함은 어찌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이 행복을 위한 자연스런 욕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명이 만들어낸 욕구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행복을 지키지 못하는 듯하다. 자연의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갑자기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켜고 돌아다니며 “사람을 찾습니다” 외쳤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그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진리가 세속적인 욕망에 가려 참다운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고 하는데 학문이 발전하고 과학이 수직상승하고 부족한 거 없어 보이는 이 세상에도 여전히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을 갈망하니 슈퍼 초특급 레이저를 들고 다녀도 모자랄 것같다. 진리는 사람에게 있고 진정한 행복은 사람관계 속에서 생겨난다는 평범한 말이 명언처럼 다가온다.
사람 찾아 가족을 창조하기 위해, 행복을 위한 자연스런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가 아시아로 이동하는 시기가 온 듯하다. 사람 사는 동네 다 비슷하다 하겠지만 호이징하(Johan Huizing)가 이야기한 호모루덴스(Homo Ludens=Man the Player=놀이하는 인간)의 사람찾기놀이는 앞으로 아시아 동네에서 벌어질 것 같다. 그러니 우리동네 아시아로 놀러오겠다는 이웃동네 아이들에게 와 봐도 별 볼 것 없다고 막아서지는 말아야겠다. 햇빛은 가리지 말아야겠다. 다른 동네아이들이 와도 편히 놀게 해줘야겠다. 당연히 놀이를 위한 기본과 규칙은 있어야 되겠다. 그래야 나도 같이 재밌게 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