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넘어 ‘사랑의 지배'(Rule of Love)로
누가복음 19장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눅 19:46)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환전상들의 상과 제물을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질된 모습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환전상이나 제물을 파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억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나름 합법적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신명기 14장 24절 이하의 율법에 따르면 성전에서 돈을 바꾸거나 제물을 매매하는 행위는 허용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적법했습니다.
그러나 법은 그 존재 순간부터 개인이나 집단의 이권을 위해 악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제도와 시스템의 빈틈을 기막히게 찾아내 그 좁은 틈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습니다. 이것은 법이 약해서라기보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절세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법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 하여 더 많은 세금을 자발적으로 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다국적 기업들은 여러 국가의 법적 제도를 교묘히 활용해, 법적으로 문제는 없으나 실제로는 자국의 세금 부담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상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마저도 악용합니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환전과 제물 매매를 허용했지만, 그들은 성전을 결국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뒤엎으신 것은 단순히 환전상들의 상이나 제물을 파는 자들의 의자가 아니었습니다. (Rule by Law로서의) 율법주의 전체를 뒤집어 엎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모세의 율법을 여섯 번씩이나 뒤집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법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법은 필요하지만, 법이 만능은 아닙니다. 법은 법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법을 완성하려는 인간은 결국 더 많은 법을 만들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인간에게는 법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법 조항을 계속 늘리고 더 세밀하게 적용함으로 율법을 완성하려 했지만, 예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모든 율법 조항을 단 두 개의 명령으로 압축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완성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뒤엎으셨고,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넘어 사랑의 지배(Rule of Love)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