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나도 원래 길을 잃은 양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이러한 목자의 행동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몹시 불편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소중하고 남아 있는 양은 소중하지 않은가?”, “자기 멋대로 무리를 이탈한 하나를 위해 왜 우리가 이렇게 위험 속에 남겨져야 하는가?“라는 불만을 품는 양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를 위해 아흔아홉을 방치하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더 많은 숫자의 양이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목자는 왜 한 마리를 찾아 떠나는 무모한 결정을 했을까요?
이 불편함은 뒤이어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계속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태도가 몹시 기분 나빴습니다.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지만, 내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으셨으면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에게는 어떻게 잔치를 베풀어줄 수 있습니까?”라며 항의합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를 위해 아흔아홉을 버려두거나, 재산을 탕진한 아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일은 불공평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합니다. 나도 원래 길을 잃은 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바로 그 잃어버린 한 마리였음을 우리는 종종 잊습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찾아 나섰던 목자의 그 사랑, 그 무모한 집념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나에게 주어진 구원은 효율성을 계산한 결과나 합리성을 고려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불공평한 사랑, 효율과 합리의 기준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허비 덕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하나를 구원하시고자 시간을 허비하시고 열심을 허비하시고 사랑을 허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독생자를 버리신 하나님의 극단적인 편애가 바로 그 사랑의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