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수필] ‘엄마’ 피천득 “나는 엄마 같은 애인이 갖고 싶었다”
마당으로 뛰어내려와 안고 들어갈 텐데 웬일인지 엄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또 숨었구나!’ 방문을 열어 봐도 엄마가 없었다. ‘옳지 그럼 다락에 있지.’ 발판을 갖다 놓고 다락문을 열었으나 엄마는 거기도 없었다. 건넌방까지 가 봐도 없었을 때에는 앞이 아니 보였다. 울음 섞인 목소리는 몇 번이나 엄마를 불렀다. 그러나 마루에서 재각대는 시계 소리밖에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주춧돌 위에 앉아서 정말 엄마 없는 아이같이 울었다. 그러다가 신발을 벗어서 안고 벽장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날 유치원에서 몰래 빠져나왔었다. 순이한테 끌려다니다가 처음으로 혼자 큰 한길을 걷는 것이 어떻게나 기뻤는지 몰랐었다. 금시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잡화상 유리창도 들여다보고, 약 파는 사람 연설하는 것도 듣고, 아이들 싸움하는 것 구경하고 그러느라고 좀 늦게야 온 듯하다. 자다가 눈을 떠 보니 캄캄하였다. 나는 엄마를 부르면서 벽장문을 발길로 찼다.
엄마는 달려들어 나를 끌어안았다. 그때 엄마의 가슴이 왜 그렇게 뛰었는지 엄마의 팔이 왜 그렇게 떨렸는지 나는 몰랐었다. “너를 잃은 줄 알고 엄마는 미친년 모양으로 돌아다녔다. 너는 왜 그리 엄마를 성화 먹이니. 어쩌자고 너 혼자 온단 말이냐. 그리고 숨기까지 하니. 너 하나 믿고 살아가는데, 엄마는 아무래도 달아나야 되겠다.” 나들이 간 줄 알았던 엄마는 나를 찾으러 나갔던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그저 울었다.
그 후 어떤 날 밤에 자다가 깨어 보니 엄마는 아니 자고 앉아 무엇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엄마 옆에 앉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장롱에서 옷들을 꺼내더니 돌아가신 아빠 옷 한 벌에 엄마 옷 한 벌씩 짝을 맞춰 차곡차곡 집어넣고 내 옷은 따로 반닫이에 넣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슬퍼졌지만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엄마는 아빠를 따라가고 말았다.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내가 타고난 영광이었다. 엄마는 우아하고 청초한 여성이었다. 그는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는 도道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그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거짓말한 일이 없고, 거만하거나 비겁하거나 몰인정한 적이 없었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 내가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그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지 못한 때문이다.
엄마는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비단이나 고운 색깔을 몸에 대신 일이 없었다. 분을 바르신 일도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보고 아름답다고 하면 엄마는 죽은 아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여름이면 모시, 겨울이면 옥양목, 그의 생활은 모시같이 섬세하고 깔끔하고 옥양목같이 깨끗하고 차가웠다. 황진이처럼 멋있던 그는 죽은 남편을 위하여 기도와 고행으로 살아가려고 했다. 폭포 같은 마음을 지닌 채 호수같이 살려고 애를 쓰다가 바다로 가고야 말았다.
엄마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내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 나는 그 후 외지로 돌아다니느라고 엄마의 무덤까지 잃어버렸다. 다행히 그의 사진이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삼십 시대에 세상을 떠난 그는 언제나 젊고 아름답다. 내가 새 한 마리 죽이지 않고 살아온 것은 엄마의 자애로운 마음이요, 햇빛 속에 웃는 나의 미소는 엄마한테서 배운 웃음이다. 나는 엄마 아들답지 않은 때가 많으나 그래도 엄마의 아들이다.
나는 엄마 같은 애인이 갖고 싶었다. 엄마 같은 아내를 얻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서영이가 아빠의 엄마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간절한 희망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엄마와 나는 숨기내기를 잘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를 금방 찾아냈다. 그런데 엄마는 오래오래 있어야 나를 찾아냈다. 나는 다락 속에 있는데, 엄마는 이 방 저 방 찾아다녔다. 다락을 열고 들여다보고서도 “여기도 없네” 하고 그냥 가 버린다. 광에도 가 보고 장독 뒤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하도 답답해서 소리를 내면 그제야 겨우 찾아냈다. 엄마가 왜 나를 금방 찾아내지 못하는지 나는 몰랐다.
엄마와 나는 구슬치기도 하였다. 그렇게 착하던 엄마도 구슬치기를 할 때는 아주 떼쟁이였다. 그런데 내 구슬을 다 딴 뒤에는 그 구슬들을 내게 도로 주었다. 왜 그 구슬들을 내게 도로 주는지 나는 몰랐다.
한번은 글방에서 몰래 도망왔다. 너무 이른 것 같아서 한길을 좀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왔다. 내 생각으로는 그만하면 상당히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 엄마는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고 물었다. 어물어물했더니, 엄마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막 때린다. 나는 한나절이나 울다가 잠이 들었다. 자다 눈을 뜨니 엄마는 내 종아리를 만지면서 울고 있었다. 왜 엄마가 우는지 나는 몰랐다.
나는 글방에 가기 전부터 ‘추상화’를 그렸다. 엄마는 그 그림에 틀을 만들어서 벽에 붙여 놓았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추상화가 없을 때라,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은 아마 우리 엄마가 좀 돌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엄마는 새로 지은 옷을 내게 입혀 보는 것을 참 기뻐하였다. 옷 입히는 동안 내가 몸을 가만두지 않는다고 야단이었다. 작년에 접어 넣었던 것을 다 내어도 길이가 작다고 좋아하였다. 그런데 내 키가 지금도 작은 것은 참 미안한 일이다. 밤이면 엄마는 나를 데리고 마당에 내려가 별 많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북두칠성을 찾아 북극성을 가르쳐 주었다. 은하수는 별들이 모인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그때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행히 천문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나는 그 후부터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엄마는 나에게 어린 왕자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나는 왕자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전복을 입고 복건을 쓰고 다니던 내가 왕자 같다고 생각하여서가 아니라 왕자의 엄마인 황후보다 우리 엄마가 더 예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쁜 엄마가 나를 두고 달아날까 봐 나는 가끔 걱정스러웠다. 어떤 때는 엄마가 나의 정말 엄마가 아닌가 걱정스러운 때도 있었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달아나면 어쩌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때 엄마는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영영 가 버릴 것을 왜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는지 지금도 나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