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 조세형20] 악인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오랫동안 판사로 재판을 해 온 한 법원장과 검사장을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법원장이 이런 말을 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인간이 선한 건지, 악한 건지 정말 모르겠어. 참회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도 아직 모르겠어.”
같이 있던 검사장이 그 말에 동조하면서 덧붙였다. “사형집행을 지휘하러 구치소에 갔었죠. 목에 밧줄이 걸리는 순간까지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자기는 억울하다고.”
오랜 세월 범죄인들과 마주한 판사나 검사들의 의식은 인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악인으로 찍힌 대도는 선해질 수 없는 것일까? 그가 도둑질을 끊고 선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을 때라야 그는 석방될 가능성이 있었다.
“교도관이라기보다는 장로라고 불러주십쇼. 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이 공무원복을 입고 있는 것도 하나님이 감옥 안에 들어가 사명을 다 할 수 있도록 만드신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의 정체성은 사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근무했던 청송교도소는 교도소 중의 교도소입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버려진 사람들이 던져지는 인간 쓰레기장이죠.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이죠. 재소자들은 흔히 자해를 합니다. 세상에 대한 반항이자 스스로에 대한 환멸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들을 꺾기 위해 몽둥이부터 들었습니다. 교도관들도 사실 재소자처럼 막가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반쯤은 징역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명처럼 들릴 지는 모르겠지만 교도관들도 독해지지 않으면 그 안에서 버틸 수가 없어요. 제가 몽둥이를 들었던 것도 어떻게든 저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어리석은 사명감 때문이었죠.”
“변호사님 하고는 달리 우리 교도관들은 오랜 직업에서 나오는 또 다른 눈이 있습니다. 재심을 받기 위해 올라온 대도를 서울구치소 안에서 봤어요. 내가 전도해 줬다고 반가워하고 좋아하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대도의 걷는 모습을 봤어요. 호보(虎步)였어요. 호랑이처럼 소리내지 않고 성큼성큼 걷는 거죠. 그건 밤에 남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 본능적으로 아직도 감옥에서 연습하는 걸로 봅니다. 또 대도의 눈을 보면 아직도 힘이 빠지지 않았어요. 정말 참회하고 있는 건지는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그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 무렵 나는 장 주네가 쓴 고전 <도둑일기>를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도둑의 내면세계를 설파한 세계적인 명작이었다. 세상은 보통사람들의 시각에서 도둑을 보고 그들에게 참회를 요구하고 처벌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 책은 도둑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면 전혀 다르다고 하고 있었다.
도둑의 나라에서 참회란 보통사람이 모든 걸 버리고 산 속으로 수도하러 들어가는 것만큼 이상한 것이었다. 그들의 윤리는 얼마나 기술 좋게 많이 훔쳐서 위대한 도둑이 되느냐였다. 도둑질은 생리였으며 쾌감을 주는 삶의 방편이었다. 궁핍해서 하는 것도 아니었고 목적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도둑질 자체가 가치의 중심에 있었다. 보통사람은 도둑질하면 양심이 아프다. 도둑의 세계는 짜릿한 쾌감이 양심을 이기고 있었다. 책에서 말하는 이론이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정한 거처가 없고 직업이 없어 그가 다시 도둑질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1심 판결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악인은 결코 선해질 수 없다는 사회의 편견에 맞서고 싶었다. 물론 스스로의 의지로 선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경우 파우스트 박사 같은 과정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인간의 영혼에 들어오면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고 나는 믿는다.
비겁한 베드로도, 악독한 바울도, 많은 사람들도 어떤 존재가 내면에 들어오는 순간 본질이 변했다. <레미제라블> 속의 장발장은 먹을 것을 도둑질 하고 오랜 세월 감옥에서 살았다. 석방이 되어서도 신부집의 은촛대와 식기를 또 훔쳤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영혼이 변했다. 그를 담당하던 경찰인 자베르 경감은 끝까지 그의 참회를 믿지 않았다. 나는 그 작품을 쓴 빅토르 위고의 인간관에 찬성표를 던지고 싶었다.
대도가 석방되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다. 나는 마지막 변론에서 대도가 묵을 곳이 없으면 나의 집에서 있게 하고 일자리도 구해주겠다고 재판장에게 말했다. 30년이 흐른 지금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의아하다. 순간적인 치기일까. 공명심에 들뜬 거짓된 자아였을까. 아니면 내 속에 있는 어떤 존재가 그에게 빛의 세계로 나오라는 계시였을까.이기적이고 소심한 내가 한 말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