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혼과 눈물의 ‘학전 33년’, 1막은 내렸지만…
[아시아엔=서정민 <한겨레> 기자]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야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14일 오후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에서 가수 김민기의 나지막한 읊조림이 공연의 문을 열었다. 다음날 문 닫는 이곳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릴레이 공연 ‘학전 어게인 콘서트’ 마지막 날 무대다. 라이브 연주에 김민기의 녹음된 음성이 포개진 이 곡의 제목은 ‘봉우리’.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당시 메달을 따지 못하고 대회 도중 귀국해야 했던 선수들을 위로하고자 김민기가 만든 노래다. 지속적인 재정난과 김민기 대표의 건강 문제로 창립 33주년을 맞는 15일 폐관하는 학전의 이날 마지막 무대가 봉우리인지도 모른다고 위로하는 듯했다.
이날 공연은 ‘김민기 트리뷰트’ 무대로 꾸몄다.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김민기의 ‘철망 앞에서’를 부르고는 “우리가 40년간 노래할 수 있었던 건 우리 이름을 지어주고 1집 기획도 해준 김민기 선배님 덕”이라고 말했다.
이어 등장한 박학기는 김민기의 1971년 데뷔곡 ‘친구’를 특유의 미성으로 불렀다. 고3 때 동해안에 야영 갔던 김민기가 익사한 후배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려고 서울로 가던 기차에서 만든 노래다. 박학기는 “원곡은 몇만미터 심연의 느낌”이라며 노래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다. 권진원은 “김민기 선배님 노랫말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누구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분”이라고 말하고는 ‘아름다운 사람’을 불렀다. 노래 시작 전 목이 메어 잠시 멈추기도 했다.
다음에 등장한 이는 학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 황정민이었다. 그는 “20대를 오롯이 여기서 먹고 자고 울고 웃으며 보냈다. 김민기 선생님은 늘 기본에 충실하라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그때 초심을 떠올린다. 학전은 저에게 영원하다”고 말한 뒤 ‘작은 연못’을 불렀다.
젊은 가수들도 함께했다. 알리는 ‘상록수’의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는 마지막 소절을 유독 힘줘 불렀다. 정동하는 ‘천리길’과 ‘내 나라 내 겨레’를 강렬한 록 버전으로 내질렀다.
마지막에 출연자 모두 다시 나왔다. 이번 공연을 기획·진행한 박학기는 “내일이면 학전이 문 닫는 날”이라고 말하다 울컥했다. 그는 “김민기 선생님이 오시진 못했지만 마음으로 함께하신다. 제게 전화해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전하셨다”고 했다. 함께 마지막 곡 ‘아침 이슬’을 부르자 관객들도 따라 불렀다.
근처에서 청국장 식당을 운영하는 손충복(76)·김정득(75) 부부도 이날 공연장을 찾았다. 그들은 “학전이 시작할 때 우리 식당도 문 열었다. 김민기 대표와 배우·가수·직원들이 식당을 자주 찾아 가족처럼 지냈다. 학전이 문 닫는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김민기 대표는 학전 빚과 직원 퇴직금 등을 해결하고자 집까지 내놓으려 했으나, 학전 폐관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이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어린이극 ‘고추장 떡볶이’, ‘학전 어게인 콘서트’ 등을 찾은 덕에 충당할 수 있었다. 여기에 음악인·배우 등도 십시일반 힘을 보탰다. 이수만 전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도 박학기를 통해 김 대표에 대한 존경의 뜻과 도움의 손길을 전했다고 한다.
학전 폐관 이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간을 이어받아 운영할 예정이다. 학전이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지만, 어린이극 등 학전의 기존 사업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위원회 관계자는 “재개관은 7월 이후가 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