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나의 시선이 처음 성경책에 꽂혔을 때
20대 중반 어느 날 밤, 나는 하얀 눈이 두껍게 덮인 휴전선 산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수은주가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그 무렵 나의 내면도 차디찬 고드름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희망이 꺾인 채 군대에 끌려와 있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주위를 보면 배경이 있는 집 아들이 군대에 온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의사들은 적당한 병명을 붙여 있는 집 아이들을 보호했다. 조선시대부터 군대는 상놈의 자식들만 갔다.
밤새 순찰을 마치고 새벽 여명이 밝아올 무렵 나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부하인 김 중사가 두꺼운 수첩 같은 책 두권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기독교 단체에서 공짜로 보내온 성경인데 종이가 얇고 부드러워서 찢어서 담배가루 말아 피우면 좋습니다.”
그 무렵 나는 하나님은 약한 인간이 만든 관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도하는 사람을 보면 너나 믿으라고 조소를 보낸 적도 있었다. 난로 불에 몸을 녹이면서 무심히 책상 위에 있던 성경을 들고 몇장을 들추어 보았다.
그릇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도공이 여러 종류의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었다. 큰 그릇도 있고 작은 그릇도 있었다. 신은 그렇게 인간을 다양하게 만들어 낸다는 비유 같았다. 어떤 용도로 어떻게 만들던지 그건 신의 소관이니까 인간은 불평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라는 존재의 크기와 용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소년 시절 학교에서는 야망을 가지라고 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선생님들은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다. 개천에 살던 미꾸라지인 나는 용이 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왜 천한 용도에 쓰는 작은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신에게 따지고 싶었다. 아예 신경줄을 모두 끊어 희망조차 품지 않게 했어야 했다.
그게 신이 내게 전해준 최초의 메시지였다. 슬펐지만 나는 내 주제를 알게 됐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상했다. 받아들이니까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나는 성경을 읽은 적이 없었다.
30대 중반 무렵 나는 독특한 체험을 했다. 사무실에 앉아있던 오전 무렵이었다. 갑자기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퇴근할 때 서점에 들려 한 권 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현대인의 교양으로서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다시 한 30분쯤 흘렀을 때였다. “성경을 읽어라”는 계시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냥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시 10분쯤 흘렀을 때였다. 누군가가 내 등을 확 밀어냈다.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확실한 물리력이었다. 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다급하게 차를 몰고 광화문의 지하 서점으로 갔다.
성경코너에 신약성경 한 권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었다. 그걸 사서 다음날부터 읽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읽었다. 직장에서도 읽었다. 이상했다. 논리와 이성으로 그 내용들을 따지지 않았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됐다. 내 영혼은 스펀지같이 그 내용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30번을 읽고 60번을 읽고 100번이 넘었다.
내가 스스로 읽은 것이 아니고 읽혀진 것 같았다. 내 영혼에 어떤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 느낌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보는 방향이 바뀐 것 같았다. 눈이 바뀌니까 해석이 달라졌다. 그분은 천천히 열매가 익듯 내가 충분히 고통받고 길을 찾아 헤매고 상처받으며 스스로 답을 찾아내길 기다려 온 것 같다.
징징대고 보챈다고 바로 주는 분은 아니었다. 그 분을 믿으면 실패한 인생이란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인생이든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의 그림자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다. 성공에 대한 의미와 가치도 내면에서 소리 없이 역전됐다. 어떤 극작가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역전 드라마다. 나는 그 덕에 설명할 길 없는 진한 인생을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