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복음’은 늘 복된 소식일까?

“예수님의 탄생 소식에 동방박사는 경외감에 휩싸였지만 헤롯왕은 두려움과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이처럼 산을 넘어오는 소식은 언제나 양면적입니다.” 사진은 ‘아기 예수 탄생’

나훔 1장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나 1:15)

산을 넘어오는 소식이 누구에게는 낭보이지만 누구에게는 비보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선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방식이 못마땅한 사람도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가 누구에게는 대재앙이지만, 누구에게는 소망입니다. 희년 제도가 누구에게는 자유와 해방이지만, 누구에게는 시스템의 붕괴요 허무함입니다. 말씀의 맛이 송이꿀보다 더 달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의 맛보다 쓰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람도 있고 미련한 것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에 동방박사는 경외감에 휩싸였지만 헤롯왕은 두려움과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이처럼 산을 넘어오는 소식은 언제나 양면적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34)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 때문에 평안을 맛본 사람도 있지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불안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그것에 반응하는 존재 안에 두 가지 가능성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며 삶의 방향과 태도의 결단을 촉구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용서와 심판이라는 양면성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훔서에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가 나타나 있지만 반대로 요나서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한 없는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순처럼 보이는 두 가지 실상이 원래 하나의 실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인생에 침투하여 들어오는 무한자의 활동에 내 삶이 알러지로 반응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이 말 그대로 복음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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