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마약이 된 종교를 소비하는 사람들

“때로는 불편하고 마주하기 싫고 고통스럽기도 한 것이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진리로 인한 자유이지 마음의 위안이나 평안한 느낌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종교가 아닙니다.” 사진은 연세대 구내에 있는 조형물

에스겔 13장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겔 13:10)

평강이 없는데도 왜 평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평안이라도 좋으니 나에게 평안을 빌어달라고 그 때나 지금이나 선지자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라고 말하는 예레미야나 에스겔을 선호했을까? 아니면 위로와 평안을 전하는 선지자를 선호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사드가 이 개념을 가장 먼저 사용했는데, 사람들이 종교에 의존하는 심리를 이용해서 그 영혼을 착취하는 로마 카톨릭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마약 맛을 본 사람이 마약 판매상을 계속 찾는 것처럼 종교적 진통제 맛을 본 사람은 그것을 끊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마약 유통업자와 마약 소비자의 죄를 함께 물으십니다.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겔 14:10)

때로는 불편하고 마주하기 싫고 고통스럽기도 한 것이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진리로 인한 자유이지 마음의 위안이나 평안한 느낌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지 않으셨습니다(마가복음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란 고통을 덜어주는 진통제입니다. 진통제를 먹으면 좀 견딜만 하셨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수월하게 지는 편을 거부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이길 원하는지 아니면 그저 교양있고 품위 있는 종교인이기를 원하는지는 십자가가 내 등에 지워져 있는가, 아니면 인식 속에서 지워져 있는가를 보면 압니다.

십자가가 빠진 거짓 복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탄은 성경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떼어놓는 대신 우리의 성경 읽기를 십자가로부터 떼어놓고는 합니다. 나의 죄악에 대한 인식과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구하는 평안은 끊기 힘든 마약일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 자아가 해체되고 부서질 각오가 없다면 진통제 한 알 사러 약국을 찾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죄로부터 파생된 모든 문제는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으면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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