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혜미의 글로벌 라이프①] 뉴질랜드 이웃 필립씨의 70세 생일파티

“치매 걸린 아버지와의 대화를 꾸준히 기록해왔던 딸 크리스틴은 말년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를 기억하며 <Dad, You’ve Got Dementia>라는 책을 뉴질랜드에서 출판하였다. 그녀는 지금 웰링턴 치매협회에서 일하고 있다. 필립씨는 만년에 지인들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지인들은 지금도 필립씨가 어떤 사람인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문득 필립씨가 생각날 때 그 책을 통해 그를 추억할 수 있게 돼 감사하다.”(본문 가운데)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살던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대문 앞 우체통을 열어보니 반가운 편지가 한 통 들어 있었다. “미스터 필립의 70세 생일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소중한 추억들을 참석자들과 함께 나누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선물은 사양합니다. 딸 크리스틴으로부터….”

웰링턴에서 살 때 현지인 필립씨의 집 2층을 임대하여 딸아이와 함께 지냈던 3년 동안 쌓았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공간은 달랐지만 같은 집에 살면서 목격했던 그의 삶의 모습과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그의 가치관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지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인종과 국적과 피부색과 지위에 관계없이 늘 한결같았다. 또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베푸는 사랑과 배려는 많은 사람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베푸는 그의 넓은 마음과 지혜가 담긴 조언에는 명확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다양한 독서와 봉사활동 그리고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 얻어진 그의 통찰력과 세련된 유머, 미소 띤 얼굴은 상대방을 늘 편안하고 유쾌하게 해주었다.

필립씨의 70세 생일에 그와 연관된 다양한 손님들이 파티장소에 초대 되었다. 몇 가닥 밖에 남지 않은 은발머리와 주름진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고, 노년의 여유로움과 편안함을 엿볼 수 있었다. 딸 크리스틴의 인사말로 파티가 시작되었다. 스크린에 비친 아기 필립의 귀여운 모습과 개구장이 소년 필립의 빛바랜 흑백사진이 공개되자 ‘와우!’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딸 크리스틴이 수소문하여 찾아낸 소년 필립의 죽마고우들이 무대로 나와서 소년 필립과의 옛 추억들을 얘기하였다.

건장한 체격의 청년 필립의 20세의 모습이 스크린에 비춰지고 그의 직장 동료였던 은발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서 직장생활 시절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그 다음은 장면으로 그의 결혼식 사진과 30대 시절의 가족사진이 비춰졌다. 그 때 가까이 지내던 이웃집 가족들이 나와 함께 피크닉을 갔었던 옛 추억들을 소개했다.

그런 식으로 미스터 필립의 40, 50, 60, 70세에 그의 삶과 연결된 지인들이 순서대로 소개되었다. 내빈들 중에 유일하게 외국인 대표로 초청된 나는 아이교육을 위해 낯선 나라에서 기러기 가족이 된 내게 베풀어준 필립씨의 친절과 사랑은 내게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는 얘기를 전했다.

필립씨의 마무리 인사말 직전에 그의 세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순서가 있었다. 아버지로서 또 한 사회인이자 인격체로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 자녀들을 어떻게 대해 주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을 신뢰하며 기다려 주었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아버지 덕분에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며 아버지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떠한 편견 없이 이웃들을 사랑하고 지역 공동체에 헌신했던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 합니다!”라는 자녀들의 고백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몇 년 뒤에 웰링턴에 들렸을 때 필립씨에게 연락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그가 치매에 걸리게 되면서 지인들을 기억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70세 생일파티가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축제가 되었다.

치매 걸린 아버지와의 대화를 꾸준히 기록해왔던 딸 크리스틴은 말년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를 기억하며 <Dad, You’ve Got Dementia>라는 책을 뉴질랜드에서 출판하였다.

그녀는 지금 웰링턴 치매협회에서 일하고 있다. 필립씨는 만년에 지인들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지인들은 지금도 필립씨가 어떤 사람인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문득 필립씨가 생각날 때 그 책을 통해 그를 추억할 수 있게 돼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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