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칼럼] 국가보훈부 출범···”조국에 헌신하신 영령들께 무한 감사를”
지난 6월 5일 ‘국가보훈처’가 ‘국가보훈부’로 승격이 되었다. 1961년 ‘군사원호청’에서 출발한 지 62년이 지나 ‘부’가 된 것이다. 장관의 의전 서열이 아홉 번째라고 한다. 정부 부처의 명(名)과 격(格)은 저마다의 이유로 변경과 부침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국가보훈부의 공식 출범처럼 대대적 행사와 홍보가 이루어진 것은 흔하지 않은 경우이다. 승격의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야의 정치적 합의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원만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경술국치에서부터 오늘에 이르는 백 년 남짓의 시간은 반만년 역사에 비하자면 찰나(刹那)와 같다. 이 짧은 기간에 우리 역사는 국권이 침탈되는 치욕과 다시금 회복되는 광복을 경험했다. 민족이 분단되는 아픔도 잠시 참혹한 전쟁으로 온 나라는 잿더미가 되었다. 건국, 건군, 산업화 및 민주화가 쉴 새 없이 이어진 숨가쁨의 연속이었다. 이 소용돌이 가운데 보훈 정책과 의미가 갑론을박이 되었던 것을 부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보훈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폐해에 갇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작고한 한 정치인은 우리 정치를 두고 “보수가 독재, 진보가 종북인 희한한 대한민국”이라는 어록을 남겼다. 건국 및 건군의 과정에서 친일파에 대해 관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자유의 가치 하에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에 친일 잔재가 스며들었다. 보수 기반의 독재 정권이 기득권 보호를 위해 자행한 독립 유공의 폄하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많은 수많은 구국의 영웅들이 홀대를 받았다. 유족들은 가슴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던 안타까운 시간들이 있었다. 일부 진보가 종북과 분리될 수 없어 낳은 우리 시대의 민낯이다.
서독에서의 광부와 간호사들의 눈물, 해외 파병 등지에서 목숨을 잃거나 몸을 다친 분들 덕분에 우리는 산업화의 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 민주화 투쟁이 있었기에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산업화 및 민주화 가치를 억지로 짓눌렀던 상식 이하의 시간들을 지내왔다.
진흙탕과 같은 대립 속에서 정작 예우를 받아야 할 자들의 서글픈 현실이 가려진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9년 5월 18일, 필자의 아버지가 순직한 날이다. 필자가 태어난 지 만 22개월, 여동생은 생후 103일째 되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두 남매를 홀로 키우셨다. 필자는 6월이 싫었다. 이 때면 학교에서 원호대상자 조사를 했다. 무미건조한 손들기 조사는 애비 없는 자식임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계기였다. 보훈 자녀이지만 아무런 자긍심을 느낄 수 없었다.
월남전에서 전사한 부친을 둔 박민식 초대 보훈부장관의 어릴 적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필자의 어릴 적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이 땅의 많은 보훈 유족들이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박민식 장관이 천안함 전사자와 순직자를 한명 한명씩 호명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박 장관은 호명할 때마다 진심을 다하는 듯했다. 진정으로 예우했고, 유족들을 마음을 다해 안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마음이 울컥했다. 여기저기서 많은 유족들이 보상금을 기부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들이 물질적으로 부유해서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자긍심이 길이 빛나길 바라는 그 한 마음일 것이다.
박 장관의 취임사의 한 부분이다.
“보훈 정책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합니다. 특정 기념일에만 찾는 일회성 보훈이 아닌 일상 속 보훈, 문화로서의 보훈으로 늘 우리 생활 속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쟁 등으로 더 이상 보훈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는 보훈 덕분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적어도 보훈 앞에서는 하나가 되길 바란다. 성숙한 보훈 의식을 통해 보훈이 문화로 자리매김하길 소망한다.
항상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잠시 숙연해지는 마음을 갖긴합니다.필자가 인용한 보훈장관의 말씀처럼 우리사회에 보훈이 문화로서 정착,자리매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