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묵호항서 만난 50대 “인생 나누며 사는 거죠”
저녁 무렵 아내가 게가 먹고 싶다고 했다. 묵호항 근처의 어시장안 게를 쪄서 파는 식당들을 돌아봤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장소였다. 새로 인테리어를 한 듯한 깨끗한 식당 2층으로 올라갔다. 아내와 나는 바다가 보이는 창가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나는 늦게 먹은 점심이 소화가 덜 됐는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다. 게를 넣은 라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내가 먹을 정도의 양과 조금 보태 자리값 정도는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문을 받으러 50대쯤 되는 여자가 다가와서 말했다.
“저희 식당은 셋트로 팝니다. 2kg 이상의 게에 회와 멍게나 해삼등이 곁들여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 셋트의 기본은 17만원입니다.”
나이 먹은 우리 부부가 먹기에 부담이 되는 양이었다. 아내가 주문을 기다리는 여자에게 말했다.
“게를 1kg만 주문할 수는 없을까요? 자리값이 안되면 쪄주시면 그걸 사가지고 가서 집에서 먹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는 안되겠는데요.”
여자는 그들이 정한 양과 가격의 음식을 먹지 않으면 나가라는 눈치였다. 우리 부부는 할 수 없이 멋적게 일어서서 그 음식점을 나왔다.
아내가 나를 보고 말했다.
“들어갈 때부터 헐렁하게 옷을 입은 우리 부부를 돈이 없게 보고 마땅해 하지 앉는 눈치였어.”
나는 북평의 5일장에서 파는 오천원짜리 반바지와 싸구려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런 차림이 편했다. 우리는 다시 나와 식당가를 걷다가 문이 열려있는 다른 허름한 가게로 들어갔다. 안쪽의 탁자에 남녀 한 쌍이 앉아있고 우리가 문쪽의 탁자에 자리잡고 앉았다. 주방 앞에서 젊은 남자가 김에 찐 게를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담고 있었다. 아내가 그걸 보고 그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도 저런 게를 주문하고 싶은데요.”
“지금 게가 없습니다.”
“지금 요리하시는 건 뭐죠?”
“이건 저기 앉아계시는 손님이 주문해서 옆의 게를 파는 집에서 저희가 사가지고 와서 찐 겁니다. 저분들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주시면 안되요?”
아내는 오늘따라 몹시 게를 먹고 싶은 모양이다.
“게를 파는 집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게철이 다 지났습니다. 러시아에서 수입한 게도 없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죠. 곰치국 2인분을 주세요.”
아내는 서운한 표정이 역력했다.
잠시 후 우리 탁자 위에 있는 냄비에서 2인분의 곰치국이 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가게에서 일하는 남자가 부드러운 흰 속살이 보이는 빨간 게가 담긴 접시를 우리 부부 탁자 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저쪽에 계신 손님이 잡수시라고 주시는 겁니다.”
우리 부부는 깜짝 놀랐다. 저쪽 탁자에 앉아 있는 손님을 보았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녀였다. 우리보다 한참 나이가 젊은 사람들이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들도 우리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냥 넙죽 받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을 향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자 “아닙니다. 인생 나누며 사는 거죠”라고 대답이 왔다.
남자의 짧은 대답이었지만 자신의 철학을 즉각적인 선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게 특이했다.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의 상을 보니까 국물이 없어 팍팍할 것 같아 보였다. 아내가 큰 그릇을 하나 얻어 끓는 곰치국을 담아 그 남녀에게 가져다 주었다. 잠시 후 그 남자가 화장실을 갔다가 돌아가면서 내 옆을 지날 때였다. 내가 그를 보고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넉넉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그가 당황한 듯 오히려 고개를 깊게 숙이면서 인사하고 자기 자리로 갔다. 나는 그가 보낸 게 바가지에 밥 한그릇을 비벼서 뚝딱 해치웠다. 그 속에 섞인 그의 맛갈스런 양념같은 마음이 더 향기로운 것 같았다.
뭔가 인정의 빚을 진 느낌이었다. 다시는 보기 힘든 그들에게 되갚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음식점을 나오면서 계산할 때 그 남녀가 먹은 맥주와 소주 값을 조용히 지불하고 나왔다. 흐뭇한 저녁이었다. 우연히 스치고 지나가는 남이라도 서로 그렇게 정을 나누는 세상이 확장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 옆은 진홍색의 황혼이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서로 집단을 이루어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