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시스템과 환경 탓하기보다 강하고 선한 개선 의지를

“자녀의 흥미보다 주위의 환경 때문에 학원에 보내는 것이라면, 이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삶일 뿐이다.”(본문 중에서) 사진은 대치동 학원가


이 시대 젊은이는 어떤 길을 찾아야 할까?

현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리고 섣불리 위로의 말을 해주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젊은이들에게 현실이 호락호락했던 적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내용이 시대마다 다를 뿐이다.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일자리가 없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이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들은 태어나보니 나라가 없고, 또 어떤 젊은이들은 태어나보니 먹을 게 부족하다. 나라가 없거나 먹을 게 부족한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이다.

청춘이 불안한 이유는 항상 현실이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에게 호락호락한 현실은 어느 시대에도 없었다. 시대마다 항상 다른 문제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인류의 발전사는 언제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한 결과들의 축적이다.

젊은이들이 무언가를 해보려고 해도 시스템이나 환경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도 한다. 이것도 물론 동의한다. 모든 의미 있는 일들은 시스템과 환경을 돌파하는 일이다. 시 한 줄도 다 정해진 시스템과 환경이 지배하는 생각들을 돌파하면서 생긴 이단적인 흔적이다.

필자는 시스템과 환경의 역할이나 효율성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교육의 개선을 말할 때 교육제도의 문제를 먼저 언급하곤 하는데, 부정적으로 보이는 제도를 탓하기보다 우선 그 제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진실한 도전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경험상 어떤 일에서든지 제도와 환경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앞세워 제기하는 사람들은 정작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기를 때는 어떤가? 남들과 똑같이 학원에 보내서 남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게 한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해서는 탁월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도 다 안다. 그럼에도 누구나 보내고 있다. 옆집도 보내니까 그렇다. 그러면서 다들 주위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자녀의 흥미보다 주위의 환경 때문에 학원에 보내는 것이라면, 이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삶일 뿐이다.

자신의 자발성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은 시선이 항상 외부로 향하게 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고유한 나 자신을 중시하기보다 차라리 우리 가운데 한면으로 존재하는 것에 더 편안해 한다. 자녀들의 진정한 행복과 발전을 원한다면 자녀를 우리 중의 한명으로 기르기보다 고유한 주체로 길러내는 것이 좋다. 젊은이들에게도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습관적으로 ‘학’을 반복한다면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나 익명성 뒤에 감춰진 존재로 사는 것을 벗어나기 힘들다. 자치와 자율 능력을 회복해야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서 삶을 살 수 있다.

시스템이나 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지와, 시스템과 환경을 탓하기부터 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것들을 탓하는 태도를 그것들을 개선하려는 의지로 착각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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