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마윈 회장이 25세 한국인으로 뭔가를 시작한다면…

마윈 알리바바그룹 창업자 <사진=AP/연합뉴스>

어느 청년이 마윈 회장이 만일 한국의 25세 젊은이로서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묻자, 그는 뭐든지 할 거라고 말하면서 중소기업에서 일해 볼 것을 권한다. 대기업에서는 큰 기계의 부품 같은 역할밖에 할 수 없지만, 중소기업에서는 꿈과 열정을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배울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중소기업에서는 규모가 작다하더라도 회사 전체의 작동 내용을 배우고 운영하는 능력까지도 배양할 수 있다. 당연히 중소기업에서 근무한 경험은 창업을 하는 데 유리하다. 마윈의 충고는 또 창업까지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창업은 도전이고 모험이다. 취업은 기존의 시스템의 구조물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취업은 창업보다 덜 위험하고 더 안전하다. 도전적인 기풍이 있는 곳에서는 창업의 열기가 뜨겁고, 안전 신화가 강한 곳에서는 취업 열기가 강하다. 우리의 청년들이 창업보다는 취업에 무게를 더 두는 것은 안전의식이 그만큼 더 중요하게 의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안전을 깊게 의식하도록 길러진 탓이다. 이런 일은 아주 어린 학생 시절부터 시작된다.

모두가 미술학원에 가고, 모두가 태권도학원에 다니고, 모두가 피아노학원에 다니고, 모두가 영어·수학 학원에 몰려다닌다. 선행학습을 하고, 다 같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더 많이 더 먼저 배우려고 안달이다. 자기 꿈을 찾고, 그 꿈을 실현하는 데에 매진하도록 길러지지 못하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길만 걸어야 한다고 강요된다.

왜 이런 강요가 일반화되는가. 한마디로 도전적이고 짜릿한 삶 보다는 안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부모나 사회가 강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고, 자신이 당장 해내야 하는 숙제와 치러야 하는 시험과 받아야 하는 성적에만 집중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란 원래 특별하다. 다른 사람의 그것과도 다르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기존의 합리적 체계에서 이탈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위험해 보인다. 자신만의 것이 특별히 다르게 보일 때, 오히려 불안해지는 이유는 안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안전은 몰려다니고 모두 함께 뭉쳐 있으면 매우 쉽게 보장된다. 그러다가 각자 다른 자아를 찾기보다는 모두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기를 원해 버린다. 돌파하고 상승하려는 과감한 시도보다는 차라리 안전한 착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모험적인 창업보다는 안전한 취업을 선택하려는 기풍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여는 데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나약한 태도가 팽배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결국 무리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의 길을 보려는 배짱이 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된다. 합리적 분석이나 정밀한 설명보다는 혼자여도 두렵지 않으며, 안전하지 않더라도 걷고 싶은 길을 걸어 보려는 배짱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이 배짱을 우리는 비로소 용기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용기의 지점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본다. 철학적 사유가 가능한 지점에서라야 창업이나 돌파나 창의나 상상이나 독립이 가능해진다는 의미에서 창업의 기풍이 취약하다는 것은 철학적 레벨에서의 삶의 역량이 발휘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철학은 경이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깜짝 놀라는 그 순간 철학적 사유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다는 것은 새로움에 직면했다는 뜻이다. 새로움은 일반적으로 생경하다. 어색하고, 불편하며, 이상하고, 기존의 정해진 모든 것에 대해 적으로 등장한다.

기존의 방법이나 논리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생경하고 불편한 ‘신호’가 드러나지 않는다. 낯선 풍경을 대면할 심리적 준비가 안 된 것이다. 그래서 낯선 풍경도 익숙한 논리에 구겨 넣어 익숙한 풍경으로 편집해 버리곤 한다. 그러면 비로소 자신이 적대적 관계로 편입되지 않고 매우 안전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철학은 낯선 풍경을 대면할 수 있는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하나의 활동으로 등장한다. 이것을 철학을 위한 인격적 준비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낯설고 어색한 ‘신호’를 과감하게 받아들일 때, 깜짝 놀라는 내면의 동요를 경험하게 된다. 이 내면의 동요가 바로 ‘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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