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친구를 기다리지 마라

“지성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갇힌 생각을 ‘우리’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 있던 나를 ‘저곳’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이다. 보이고 만져지는 곳에서 안 보이고 만져지지 않는 곳으로 옮겨 가려고 몸부림 칠 수 있는 사람이다.”(본문 중에서) 사진은 우주선 형태의 유리 구조물로 이뤄진 애플 신사옥 <AFP/게티이미지=연합뉴스>

오늘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거대하고 투명한 벽 앞에 서 있다. 이 벽을 어떻게 건너뛰고 넘을 것인가를 궁리하고 또 시도하는 일이 시급하다. 곧 시대를 건너고 돌파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시대를 돌파할 수 있을까? 문제의식을 포착한 지성인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묻겠다. 지성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갇힌 생각을 ‘우리’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 있던 나를 ‘저곳’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이다. 보이고 만져지는 곳에서 안 보이고 만져지지 않는 곳으로 옮겨 가려고 몸부림 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미 있는 익숙한 것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익숙함에서 과감히 이탈하여 아직 열리지 않은 어색한 곳으로 건너가려고 발버둥 치는 것, 그것이 지성인의 율동이다.

새로운 시도를 감행할 때 새로 열릴 그곳을 갈망하며 꿈꾸는 힘을 상상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상상하여 얻은 새 꿈을 용기 있게 붙잡는 힘을 창의력이라고 한다.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무장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앞을 막아선 그 투명한 벽을 넘을 때 반드시 요구되는 역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적(知的)으로 혹은 지성적으로 성숙해 가고 있을까? 정해진 이론과 정해진 시스템을 지키는 지적 고착성 안에 갇힌 건 아닐까? 젊은 지성으로서 이미 있는 모든 것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편안해 한다면 지적 고착성 안에 갇힌 것이 분명하다. 익숙한 과거의 방법을 계속 고집한다면 새로운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새로운 결과, 즉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고 실행하려면 우선 익숙한 과거와 결별하려는 과감성을 발휘해야 한다. 결국 지성인은 자신만의 새로운 눈으로 시대를 읽는 사람이고, 자기가 읽어 낸 시대의식에 책임성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이다.

시대의식을 장악한 사람, 시대에 헌신하려는 사람, 시대를 건너가려는 지식인 가운데 어떤 이는 지식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천만에, 절대 그렇지 않다. 시대의식이 자기가 되지 않는 한, 자기 내면이 되지 않는 한, 우리가 하려는 많은 시도는 소란만 피우다 말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숱한 경험을 했다. 왜 예술 꿈꾸는 사람이 예술가가가 되지 못하는가. 이유는 하나다. 그 사람의 내면이 예술성을 폭발시킬 함량으로 단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예술적이라면 예술은 절로 피어난다.

나에게는 한 가지 간절한 기다림이 있다. 단 한 명이라도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철저하게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 자기가 꿈꾸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나도 나 자신에게 그 정도로 정련된 나를 만나게 해주려 부단히 애쓰고 있다. 그런 사람은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세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세계를 감동시켜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그 꿈이 자기가 되지 않은 사람, 꿈이 머리와 입에만 있는 사람은 그 꿈을 절대 이룰 수 없다. 시대의식을 장악하고 헌신하는 사람, 지적인 삶을 거기에 바치려는 사람은 시대의식이 곧 자기가 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힘, 여분의 것과 잉여의 것을 모두 제거하고 남는 자신민의 고유한 동력을 덕(德)이라고 한다. 공자도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이라 하지 않았던가.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동조자가 있기 마련이다. 이웃이 있다.

그러나 동조자를 기다리진 마라. 친구를 기다리지 마라. 우선 자기가 자기에게 친구면 족하다. 자기가 자기에게 동조자면 충분하다. 동조자를 꿈꾸는 감화력과 설득력이 생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포착한 그 시대의식으로 자기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철이 들고 나서 소소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옛날부터 때로 듣던 말 가운데 하나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공부 잘하고 못하고가 대수냐.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말이다. 예전에, 나처럼 공부 잘 못하는 사람을 그냥 위로하는 말인 줄만 알았다. “공부는 못하지만 넌 사람이 좋잖아”라는.

그런데 요즘에는 이 말을 굉장히 깊이 느낀다. 공부를 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왜 어떤 사람은 그냥 일반적인 학자고, 어떤 사람은 지성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까지 올라설까? 왜 어떤 군인은 형식적으로 근무하는데, 어떤 군인은 목숨을 바치는 헌신성을 발휘할까? 결국 그 사람의 내면과 함량이 어떠한가가 관건이다. 곧 사람이 문제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는 그 사람의 문제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가 그 사람의 지성적인 높이를 결정한다. 또한 삶의 수준과 시선의 고도를 결정한다.

우리는 지금 시대의 벽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시대의 벽을 돌파하려는 결기를 갖춘 사람이 결집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곳에 모인 이들이 가벼운 지적 체계를 숭배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학습된 진리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있어 본 적이 없는 진리를 건설하려는 도전을 감행하라. 사람이 되는 문제에 집중하라. 내가 정말 나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계속 던져 보라. 이에 대답하면서 시대를 직시하는 지성의 활동성을 강하고 질기게 발휘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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